Wave 3. 가을 노인
“유봄아, 기다렸다.”
생각지도 못했던 대사였다. 유봄은 미간을 찌푸리고 수염 뒤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어디서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인지 떠올리려 노력했지만 전혀 짐작가는 바가 없었다. 게다가 기다렸다니? 자신이 여기에 올 줄은 또 어떻게 알고?
“저를 아세요?”
“아주 잘 알지. 이번이 너를 서른세 번째 만나는 거란다.”
유봄은 또다시 귀를 의심했다.
‘서른세 번째라고? 나는 이 산신령 할아버지를 단 한 번도 만난 기억이 없는데?’
하얀 안개에 뒤덮인 비현실적인 풍경만큼이나 비현실적인 대사였다.
“배고플 테니 일단 들어와서 이야기하자. 생선을 구우며 널 기다리고 있었단다.”
유봄은 생각했다.
‘군인과 해적, 그 다음에는 미치광이 할아버지인가. 그런데 대체 내 이름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혹시 어딘가에 현상수배라도 되고 있는 걸까?'
경계를 늦출 수는 없었지만 정말로 안개를 타고 고소한 생선구이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기에 입 안에 저절로 고이는 침을 어찌할 수 없었다.
‘일단 얘기를 들어볼 필요는 있겠어.’
유봄은 침을 꼴깍 삼키며 한 발의 총알이 남은 권총과 배낭을 챙겨 오리배에서 내렸다. 유봄이 오리배를 건물 기둥에 묶을 동안 노인은 이쪽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할 뿐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유봄이 오리배를 다 묶고 나자 노인은 말도 없이 뒤로 돌아 천천히 통유리로 된 출입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원래 회사 사무실 같은 용도로 사용되던 빌딩의 옥상 정원인 것 같았다.
유봄이 잔뜩 주변을 경계하며 유리문 안으로 따라 들어오는 것을 확인한 후 노인은 또 적절한 거리를 두고 세심하게 한 걸음씩 앞서 걸어갔다. 마치 유봄이 어차피 자신을 따라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건물 기둥을 끼고 코너를 돌자 놀라운 풍경이 펼쳐졌다. 구내식당처럼 보이는 그 공간의 가운데 테이블 위에는 휴대용 가스버너가 있었고 그 위에는 프라이팬에 노릇노릇 잘 구워진 생선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모락모락 김이 나는 쌀밥과 참치 캔, 햄과 김이 놓여 있었다. 해수면 상승 이후 처음 보는 진수성찬이었다. 지금 세상에서는 군인들조차도 저 정도의 퀄리티 있는 음식을 쉽게 구할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오늘 여기서 죽게 되더라도 당장 달려가 저 모든 음식들을 흡입하고 싶었지만 애써 평정심을 되찾으려 노력했다. 동화책 속 헨젤과 그레텔을 유혹한 마녀의 과자집처럼 이 모든 게 너무도 수상했다.
유봄은 물었다.
“당신은 대체 누구죠?”
“내 이름은 추월이야. 호칭은 편한 대로 부르면 돼.”
아무 의미 없는 대답이었다. 이름이 궁금한 게 아니었다.
“어떻게 제가 올 걸 알고 있었던 거죠?”
“정확히 1년 전에도 이곳에서 유봄이 널 만났으니까.”
“저는 할아버지를 만난 기억이 없는데요?”
“그래. 너는 기억이 없겠지. 일단 의자에 앉거라. 지금은 아직 나를 믿지 못할 테니 먼저 너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주마.”
“네? 저에 대한 이야기라고요?”
노인은 밥상에 앉아 유봄에게 맞은편에 앉을 것을 권유했다. 유봄이 조심스럽게 앉는 것을 기다린 후 노인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건 놀랍게도 지난 봄부터 유봄이 겪어온 일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노인은 아차산의 춘식 씨와 개나리 가족, 롯데타워의 군인들, 63빌딩의 해적들까지 오직 유봄만이 알 수 있는 일을 마치 CCTV로 지켜보기라도 한 것처럼 이야기했다.
‘이 사람, 혹시 그 옛날 아차산에서 죽었다는 용한 점쟁이가 환생이라도 한 건가.’
“과학자야. 점쟁이가 아니라.”
노인은 마치 유봄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유봄은 과학자라는 직업 소개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 과학자라고 하기에는 외모상의 이질감이 컸다. 노인은 오히려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간달프나 ‘해리 포터’의 덤블도어 교수에 가까운 행색을 하고 있었다. 자신을 과학자라고 소개한 마법사는 더욱 충격적인 주장을 이어갔다.
“이 세계의 1년은 무한히 반복되고 있어.”
“네?”
“쉽게 말해 내년 봄은 결코 오지 않아. 이번 겨울이 지나면 다시 1년 전의 봄으로 모든 게 리셋(reset)되지. 그리고 처음부터 똑같은 삶을 반복하게 돼. 다만 사람들이 그것을 인식할 수 없을 뿐이야. 기억까지 모두 리셋되니까.”
이건 또 무슨 미치광이 철학자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 같은 소리지? 이제 무한히 되풀이되는 인생에 대한 절망과 현재의 삶에 대한 역설적 긍정을 깨달으면 되는 건가요, 차라투스트라님? 유봄은 궤짝에 갇힌 생쥐가 된 심정으로 생각했다.
“과학자야. 철학자가 아니라.”
노인은 이번에도 유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그리고 노인은 뒤에 있는 상자에서 물건을 하나 꺼내더니 테이블 위에 올렸다. 그 물건을 본 유봄은 자리에서 튕기듯 일어나 노인에게 권총을 겨눴다. 노인이 올려놓은 물건은 유봄이 가진 것과 똑같은 모양의 권총이었다. 노인은 유봄이 총을 겨누고 있다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않고 태연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하지만 매번 완전히 똑같은 삶을 사는 건 아니더라고. 지난번처럼 남아 있는 총알이 하나도 없을 때도 있었고, 그 전에는 보통 한 발. 이번에도 총알이 한 발 들어 있니?”
노인은 계속해서 눈에 익은 식칼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여기에 도착하기 전 63빌딩 앞에서 만난 야수 같은 해적이 자신을 죽이려 한 식칼이었다.
“총알이 다 떨어졌을 때는 이 식칼을 가지고 오더군. 너를 공격한 그 해적을 마지막 한 발로 쏘아야만 하는 상황이 생기는 모양이더구나.”
그 뒤로도 노인은 유봄의 물건을 계속해서 올려놓았다. 유봄이 입고 있는 원피스, 잃어버린 잠자리채, 전원이 꺼져버린 휴대전화, 지갑과 스타벅스 텀블러 등. 유봄은 그 모든 물건들을 바라보면서 ‘역시 마법사였나’ 같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멍청한 말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하고 입술만 뻐끔거렸다. 하지만 노인이 화분을 꺼냈을 때는 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봄순아!”
그랬다. 깨지지 않고 짓밟히지도 않은 봄순이가 그곳에 있었다.
“네가 반복해서 이곳을 방문했다는 증거야. 이제 나를 좀 믿을 수 있겠니?”
유봄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 다만 노인을 겨눴던 권총은 천천히 거두었다. 틀림없이 저 물건들은 유봄의 물건들이었고, 저 화분에 담긴 식물은 유봄이 보살피던 봄순이였다. 노인의 정체는 여전히 미심쩍었지만 이 세상에 무언가 유봄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당신 말대로 이 세계의 1년이 리셋된다면 어째서 당신에게는 기억이 남아있는 거죠?”
“그건 조금 긴 얘기란다. 더 식기 전에 밥을 먹으면서 들어주면 안 되겠니?”
손주에게 밥을 권하는 할아버지처럼 자상한 말투였다. 이쯤 되면 못 이기는 척 밥을 먹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을 만큼 참았잖아? 유봄의 손이 더 이상 절제하지 못하고 밥을 한 숟가락 떴다. 한 입을 넘기는 순간 마음속 경계심의 봉인이 해제되었다. 햄과 김에 따뜻한 흰밥은 진리지. 그야말로 천상의 맛이었다. 이걸 먹고 마녀에게 잡아먹힐 위기에 처하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은 먹어야겠다.
노인은 유봄이 허겁지겁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 나직한 말투로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추월이라는 이름의 노인이 들려준 이야기는 기묘했다.
그는 지금의 바다가 거미줄(web) 모양이라고 했다. 중심부에서 바깥쪽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방사형으로 뻗어나가는 형태라는 것이다.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거미줄은 바다와 바다를 나누는 경계선 역할을 했다. 그리고 오직 가로줄과 세로줄이 만나는 지점에서만 그 경계선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그걸 ‘파도의 모서리’라고 불러. 이제 너도 곧 파도의 모서리를 볼 수 있게 될 거야.”
하나의 바다가 다른 바다와 만나는 가장자리, 즉 모서리에서는 파도가 잘려 있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파도가 잘려 있다니! 말도 안 되는 망상 같은 얘기였다. 정말 이 사람은 미치광이 과학자인가?
“미치광이는 그만 빼줄래?”
노인은 이번에도 유봄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미 유봄이 하려는 말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서른 두 명의 유봄 중 마음속의 말을 실제로 내뱉은 유봄들도 있었던 모양이다.
“매년 파도의 모서리를 탐사하러 가는 탐사조가 있어. 봄에 조사를 시작해서 겨울에 마치고 돌아오게 되어 있지. 탐사조가 발견한 모서리들의 위치를 지도에 표시하면 완벽한 방사형의 거미줄 모양이 만들어지게 돼. 수학적으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있어야 할 좌표에서 모서리가 발견되더군.”
노인은 커다란 서울 지도를 식탁 위에 펼쳤다. 빨간 X자 표시를 한 지점이 모서리가 관측된 지점이라 했다. 과연 표시된 지점을 선으로 연결하면 서울시 전체보다도 거대한 거미줄 모양이 만들어졌다.
“모서리는 일종의 다중우주로 연결되는 차원의 경계선이라고 할 수 있어. 이곳에서는 시간을 되돌릴 수 있지. 그리고 중심부에 가까이 갈수록 되돌릴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나게 돼. 그 늘어나는 비율이 일정하기 때문에 수학적인 계산이 가능했지. 과학자라면 누구나 숫자를 보면 계산을 해보는 법이거든. 결론적으로 이곳 영등포의 모서리가 하루의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리고 노인은 지도의 한 지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기 중심부에서는 정확히 8765시간 48분 46초, 그러니까 1년을 되돌릴 수 있을 것으로 추정돼.”
그가 가리킨 중심부의 위치는 놀랍게도 잠실의 롯데타워였다.
‘내가 간 곳이 전우주적 규모의 핫 플레이스였던 거야? 좋아요, 대표님. 그럼 전 이제부터 외계 생명체들에게 지구의 잠실 관광상품을 홍보하는 사업을 함께 시작하면 되는 건가요?’
물론 유봄이 실제로 입 밖에 낸 말은 좀 더 이성적인 것이었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었죠?”
추월 노인은 자신의 손목시계를 가리켰다. 날짜 표기가 되어 있는 전자시계였다.
“실험을 여러 번 해봤어.”
유봄은 그 말을 듣고 갑자기 의문이 생겼다.
“그 손목시계의 시간은 과거로 돌아가지 않나요?”
“일단 과거로 돌아간다는 개념부터 엄밀하게 다시 정의할 필요가 있어. 파도의 모서리에서 시간을 되돌린다는 것은 지나온 시간대로 돌아가는 타임머신 같은 개념이 아니야. 좀 어렵게 말하면 과거의 일정한 시간을 복제한 다중우주를 생성하는 방식이지. 그때 다중우주를 생성한 주체는 복제되지 않아. 정확히는 다중우주가 생성되는 경계면인 모서리에 서 있는 주체는 복제되지 않지. 그래서 과거의 자신과 만나는 일 같은 타임 패러독스(Time Paradox)도 발생하지 않는 것이고.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세상만 복제되는 거니까. 심지어 중심부의 모서리에서 1년을 리셋할 때조차 이곳 모서리에 서 있는 존재는 복제되지 않더군. 나는 매년 1월 17일 세계가 리셋될 때 모서리에 서 있었기 때문에 기억이 되돌아가지 않은 거야.”
갑자기 이어지는 복잡한 설명에 유봄이 미간을 찌푸리자 노인은 미소를 지으며 친절한 설명을 덧붙였다.
“쉽게 말하면 인터넷 창의 새로고침 같은 개념이야. 새로고침을 한 사람만 자신이 이 세계를 새로고침했다는 기억과 상태를 유지하고 있고, 새로고침을 당한 세계는 모든 기억과 기록이 사라지는 거지.”
한결 이해가 쉬웠지만 유봄은 여전히 알 듯 말 듯했다. 잠깐 손목시계를 바라보던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이제 파도의 모서리를 직접 보러 갈 시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