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ve 3. 가을 노인
탈출하던 밤부터 한동안 꽤 세찬 동풍이 불었다. 바람과 파도가 밀어준 덕분에 유봄의 오리배는 자연스럽게 서쪽으로 나아갔다. 처음 며칠간 유봄은 혹시나 추적자들이 있을까 두려워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계속 페달을 밟았다. 타워에서 이후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다만 한 달 정도가 지났음에도 아무도 추적해오지 않는 것으로 봐서 한동이나 하수진 중위 같은 사람들이 많은 도움을 주었을 거라고 추측할 뿐이었다.
‘동이, 별 일이 없어야 할 텐데….’
동이가 상병이었나 병장이었나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튼 대위 같은 사람보다는 훨씬 낮은 계급일 거라서 걱정이었다.
특별히 정해둔 목적지는 없었지만 유봄은 꾸준히 서쪽을 향해 나아갔다. 아직도 동쪽에 보이는 롯데타워에서 최대한 멀어지고 싶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하지만 같은 방향으로 계속 나아간다는 간단한 행위조차도 바다 위에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파도와 물결은 늘 오리배의 방향 감각을 흔들어 놓았다. 목표하는 좌표와 기준점을 정확히 잡고 이동하지 않으면 자칫 위치를 잃고 망망대해를 표류하게 될 수도 있었다. 오리배에 내비게이션 같은 게 있을 리 만무했고 유봄이 옛사람들처럼 별자리를 볼 줄 아는 것도 아니었다. 매일 해가 지면서 서쪽이 어디인지 알려주기는 했지만 미묘하게 해가 떨어지는 지점이 계속 바뀌었다. 그래도 서울은 과거 랜드마크였던 건축물들이 등대 역할을 해주고 있어 방향감각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유봄은 늘 남산타워를 우측에 기준으로 두고 이동했다.
권총을 손에 넣은 유봄은 한동안 큰 어려움 없이 살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 충돌이 발생할 경우 권총을 겨누고 위협하면 대부분 조용히 물러났다. 간혹 진짜 총이 맞는지 미심쩍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유봄이 철컥 하고 장전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굳이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총기의 작동 여부를 검증해보려 하지는 않았다. 덕분에 유봄으로서는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아직까지 실제로 권총을 쏠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그래도 어떻게 쓰는지 정도는 알아둘 필요가 있겠다 싶어 몇 번 총을 만지작거리다 보니 사용법이 크게 어려워 보이지는 않았다. 영화에서 본 것처럼 윗부분에 달려 있는 ‘ㄱ’ 자 모양의 장치를 엄지손가락으로 뒤로 당겨 장전한 후 검지손가락으로 방아쇠를 당기기만 하면 바로 발사될 것 같았다. 탄창을 열어 총알을 확인할 줄도 알게 되었다. 총알은 모두 여섯 발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유봄은 가능하면 단 한 발조차 영원히 쏠 일이 없기를 바랐다.
오전에는 먹을 것을 구하고 오후에는 서쪽으로 이동하는 해양 유목민 생활을 반복하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너무 피곤한 나머지 오전 내내 늦잠을 자다가 퍼뜩 정신이 들어 깨어 보니 눈 앞에 거대한 황금빛 빌딩이 가로막고 있었다. 파도에 실려 오리배가 스스로 꽤 먼 거리를 이동한 모양이었다. 서울 사람이라면, 아니 아마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건물이었다.
‘63빌딩이잖아?’
빌딩이 너무나 가까이 다가와 있었기에 유봄은 깜짝 놀랐다. 얼른 우회해야 했다. 현재 63빌딩을 누가 장악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부동산 세력은 무조건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롯데타워의 악몽을 다시 반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유봄이 서둘러 오리배의 핸들을 조작해 방향을 돌리려고 할 때였다.
63빌딩 뒤쪽에서 그림처럼 돛단배가 출현했다. 정확히는 하얀 돛을 단 현대식 요트였다. 유봄은 여의도에 요트 탑승장이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런데 하얀 돛에 누가 낙서라도 해놓은 것처럼 적갈색의 짙은 얼룩무늬가 있었다.
펄럭!
바람을 받은 돛이 팽팽하게 펴지자 유봄은 그 얼룩무늬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솜씨 없는 화가가 그린 것처럼 조잡해 보이긴 했지만 분명 붉은색 해골 그림이었다. 그리고 해골 아래에는 X자 모양으로 두 개의 뼈다귀가 교차하고 있었다. 아마 만국 공통으로 알아볼 수 있는 도안이 아닐까 싶다.
‘이게 노마드들에게 소문으로만 듣던 해적이구나!’
적갈색 잉크의 정체를 상상하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모든 게 물에 잠긴 세상에서 잉크 같은 것을 구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균일하지 않고 얼룩덜룩 덧칠된 그것은 마치 사람 피로 그린 그림 같았다.
‘63빌딩은 해적 소굴이었어!’
유봄은 긴급히 오리배의 방향을 반대쪽으로 선회하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반대 방향에서도 해적 깃발을 건 요트가 두 대 다가오고 있었다. 도합 세 대의 요트 주변에는 또 노를 저어 움직이는 보트가 여러 대 따르고 있었다.
‘대체 언제부터 접근하고 있었던 거지?’
유봄은 스스로를 해적들이라 여기는 집단에게 서서히 포위되고 있었다. 빌딩 뒤에서 나타난 요트 뒤로는 충격적인 크기의 거대한 배가 한 척 더 나타났다. 한강 유람선이었다. 규모 면에서 압도적인 전력 차이였다. 유봄은 마침내 권총을 사용해야 할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했다.
해적들은 배를 다루는 솜씨가 능숙했다. 이리저리 방향을 틀어봤지만 도무지 유봄이 달아날 수 있는 빈틈을 주지 않았다. 오리배는 서서히 포위되다가 마침내 거대한 한강 유람선을 바로 앞에서 대면하게 되었다.
유람선 위에서는 누가 봐도 해적 선장인 자가 굵은 팔뚝으로 팔짱을 낀 채 유봄을 내려다봤다. 이미 날카로운 눈빛만으로도 무척이나 위협적인 카리스마를 뿜어대고 있었다. 하지만 대체 무슨 패션 센스인지 붉은 두건에 붉은 재킷을 입고 있었는데 두건 끝자락이 바람에 휘날리며 마치 단풍처럼 보였다. 그가 팔짱을 낀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낫처럼 보였다. 대체 이 시대에 낫이 어디서 난 거지? 홍건적의 난 같은 콘셉트인가. 그가 외모만큼 거칠고 유쾌한 뱃사람의 목소리로 말했다.
“어이, 아가씨. 나는 그 오리배가 좀 마음에 드는데?”
“안 팔아요.”
유봄의 당돌한 대답에 해적 선장은 호탕하게 웃어보였다.
“패기 있는 아가씨군. 우린 해적이야.”
“보면 알아요.”
“이 아가씨 말을 참 곱게 하는 게 마음에 쏙 드네. 어디 한번 해적이 되어볼 생각은 없나?”
이건 또 무슨 해적 만화의 한 장면 같은 상황인가 싶었다. 실례지만 혹시 이름이 ‘몽키 D. 루피’라도 되시는지 묻고 싶었지만, 사방이 해적선으로 포위된 입장에서는 무척 진지하게 고려해볼 수밖에 없는 제안이었다.
“스카우트 제의인가요?”
“그런 셈이지.”
“월급은요?"
“성과급제야. 특히 사람을 하나 죽이면 가장 비싸게 쳐주지.”
유봄은 기겁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애써 침착한 척 대꾸했다.
“해적이 되면 살인도 해야하나요?”
“당연하지. 사람 하나 못 죽이는 게 무슨 해적이라고 할 수 있겠어? 조금 전에도 하나 해치우고 왔거든. 혹시 널빤지 처형이라고 들어봤나?”
유봄이 고개를 흔들어 보이자 선장이 말을 이었다.
“전통적으로 해적들이 널리 쓰던 유명한 처형 방식이지. 널빤지 위를 걷게 해서 상어가 가득한 바다에 빠뜨리는 거야. 우린 그걸 아주 현대적으로 구현해냈지. 바로 저 63빌딩 꼭대기에 널빤지를 설치한 거야. 낭만적이지 않나?”
낭만주의자들이 들으면 기겁할 소리를 거침없이 내뱉으며 껄껄 웃어재끼는 해적 선장을 보며 유봄은 아연해졌다. 세상이 얼마나 미쳐 돌아가길래 어디서 이런 사이코패스들이 계속해서 나오는 것일까? 아니면 반대로 사이코패스들만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이 되어버린 걸까?
유봄은 이 위기를 대화로 회피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제가 해적이 되고 싶지 않다면요?”
“그 오리배만 나한테 넘겨. 그럼 살려는 드릴게.”
“오리배를 드리면 저는 뭘 타고 가죠?”
“수영할 줄 알지?”
“뭐야? 살려줄 생각이 전혀 없잖아요!”
유봄은 결국 권총을 꺼내 호탕하게 웃는 해적 선장을 겨냥했다. 선장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이죽거렸다.
“이야, 난 아가씨가 점점 더 마음에 든다. 그 총도 서비스로 주려고?”
“보내주시지 않으면 진짜 쏩니다.”
유봄은 보란 듯이 달칵, 권총을 장전했다. 제발! 그냥 보내줘!
“와, 무서워라! 뽀내쭈시찌 않으면 찐짜 쏨니당.”
해적 선장은 일부러 어린애 말투를 흉내내며 유봄의 말을 그대로 따라했고 그에 호응하듯 여기저기서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원래 사회에서도 조폭이나 깡패를 하던 사람들인가. 무슨 말투나 태도가 저렇게 껄렁껄렁하지? 그때 해적 선장이 갑자기 웃는 표정을 지우고 정색하더니 손을 들고 크게 외쳤다.
“얘들아! 저 아가씨 63빌딩에서 스카이 다이빙 한 번 시켜드려야겠다!”
와아아! 함성 소리가 들리며 요트, 아니 해적선들이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빠르게 오리배로 접근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