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ve 2. 여름의 타워
“손 들어. 움직이면 쏜다!”
보트 위에 탄 이들은 군복을 입고 있었다. 잠실 쪽은 군대가 장악하고 있다는 그 노마드의 얘기가 진짜였구나.
유봄은 순순히 두 손을 들었다. 상어는 사라지고 잠자리채의 앞부분만 남아 저 멀리 떠내려가고 있는 게 눈에 밟혔지만 지금 그걸 잡으려는 행동을 보이는 건 위험할 것이다. 괜한 오해를 사서 총 맞을 행동은 안 하는 편이 좋았다. 군인들의 총구는 유봄의 몸을 향하고 있었다.
날은 더웠고 햇살은 뜨거웠다. 조금 전까지 몸을 담그고 있었던 파도는 눈부셨고 갈매기들은 하늘을 선회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문득 근거 없는 태평한 의문이 유봄의 머리에 떠올랐다. 저 총에 진짜 총알이 들어 있긴 한 걸까? 분명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었지만 난생처음 본 총기는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게다가 이 날씨에 총이라니!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조합 같았다. 아마 어린 아이들이 총을 본다면 이런 심정이지 않을까? 하지만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총알이 총구에서 나오는지 아닌지를 테스트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유봄은 조심스러운 말투로 사정을 설명했다.
“너무 배가 고파서 여기까지 왔어요. 먹을 것만 좀 나눠주시면 안 될까요?”
그러자 군인들은 자기들끼리 무슨 말을 짧게 나눴다. 무슨 말인지 들어보려 애썼지만 엔진 소음 때문에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잠시 후 보트가 아까보다 한결 작아진 모터 소리를 내며 서서히 다가왔다. 유봄은 여전히 두 손을 든 채 눈으로 그들을 살폈다. 군인들은 보트를 조종하는 사람까지 합쳐 모두 세 명이었다. 보트가 오리배에 퉁 하고 가볍게 부딪히자 그중 한 사람이 길쭉한 총기 끝으로 유봄의 젖은 몸을 쿡 찌르며 명령했다.
“뒤로 돌아!”
총을 든 채 뒤로 돌라면 돌 수밖에.
유봄이 천천히 뒤로 돌자 군인 하나가 오리배로 건너와 손으로 몸을 더듬으며 몸수색 비슷한 것을 했다. 머리에서 어깨, 어깨에서 허리, 또 허리에서 무릎까지. 티셔츠에 반바지 차림인데 무슨 수색을 이렇게까지 오래 하는 건지, 혹시 수색을 빙자한 다른 목적이 있는 건 아닌지 슬슬 헷갈릴 무렵 그는 오리배 뒷좌석으로 넘어가 물건들을 뒤적였다. 유봄은 몹시 모욕적이고 불쾌했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적어도 지금 이 공간에서는 저들이 최상위 포식자인 상어 같은 존재였다.
“중대장님, 별다른 이상은 없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중대장이라 불린 사람은 그 까무잡잡한 얼굴에 어울리지도 않는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알이 크고 검은 보잉 선글라스였다. 하지만 그 촌스러운 선글라스로 인해 한눈에 그가 여기서 제일 높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언제나 눈빛을 들키는 사람이 약자인 것이다. 중대장이 까딱 손짓하자 유봄을 수색했던 군인이 보트로 돌아갔고 다시 보트는 오리배에서 조금 멀어졌다. 그들은 유봄과 떨어진 곳에서 이쪽을 힐끔거리며 무언가 의논을 하는 듯했다.
유봄은 절박했지만 냉정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지금의 지구는 한정된 자원을 누가 먼저 소비하느냐로 다투는 곳이다. 이곳에 접근하는 시민을 쉽게 포용하고 자원을 나눠줄 선량한 군대였다면 이미 주변 사람들을 구출하고도 남았어야 했다. 그러지 않았다는 것은 저들이 압도적 무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을 이용해 자신들만 살아남기로 결정했다는 뜻으로 보는 게 합리적이었다. 유봄은 지금부터 닥칠 상황이 어떤 것이든 긴장을 늦추지 않고 대비해야만 했다.
잠시 후 보트가 다시 다가와 일방적인 결론을 전달했다.
“인양하겠습니다. 따라오시죠.”
유봄은 속으로 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공격을 당하거나 쫓겨나지는 않았다. 군인들은 유봄의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고 오리배의 머리 쪽에 밧줄을 묶어 그들의 보트와 연결하기 시작했다. 유봄은 그들을 도와야 하나 잠시 망설였지만 아직 정식으로 인양에 동의한 것도 아니었기에 오리배에 앉아 잠자코 지켜보기로 했다. 어차피 그들에게 유봄의 의사는 별 고려대상이 아닌 것 같았다.
군인들은 무척 능숙하게 매듭을 묶었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그들은 단단한 매듭을 확인한 후 보트를 출발시켰다. 느슨한 밧줄이 물 위로 떠오르며 팽팽해지더니 유봄이 탄 오리배가 동력 보트에 끌려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모터 소리가 거세지면서 속도도 빨라졌다. 파도에 통통 튕기며 롯데타워를 향해 질주하고 있자니 마치 휴양지의 해변에서 바나나 보트라도 탄 것 같았다. 모처럼 여름 바람이 상쾌했다.
롯데타워가 점점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통유리로 된 타워 표면은 노을이 반사되며 붉게 타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이 건축물이 얼마나 거대한 부동산인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유봄은 건물의 높이를 가늠하기 위해 오리배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도 목이 아프도록 한참을 뒤로 젖혀야만 했다.
마침내 보트가 타워 입구에 도착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이 몇 층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타워 내부로 배가 진입할 수 있도록 해수면에 맞닿은 층의 외벽 유리창이 부서져 있었다. 군인들이 의도적으로 부순 것 같았다. 드러난 철골 사이에 제멋대로 깨진 유리창이 삐죽삐죽 날카롭게 돋아나 있는 모습이 상어 이빨처럼 보였다. 유봄을 인양하는 동력 보트가 속도를 늦추며 먼저 안으로 진입하자 오리배도 천천히 깨진 유리창 사이로 통과했다. 유봄은 머리 위에서 붉게 빛나는 깨진 유리 조각들을 바라보며 솔직한 감상을 내뱉었다.
“상어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네.”
부서진 유리창을 지나 건물 내부로 진입하는 순간 유봄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고 말았다. 타워 안에는 마치 항구처럼 수많은 배들이 늘어서 있었다. 돛단배에서 고무보트까지 가지각색의 배들이 빌딩 내부에 가지런히 정박하고 있는 놀라운 풍경은 어느 동화의 한 장면 같았다. 개중 하나의 배에서는 잠수복을 입고 물 아래로 뛰어드는 군인들도 있었다. 타워 아래층에서 쓸만한 물건들을 건져 올리기 위함일 것이다.
유봄은 마치 호그와트에 처음 들어간 해리 포터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위층에서 깃발을 들고 수신호를 하는 군인의 지시에 따라 유봄을 인양하는 보트도 구석 자리로 인도되었다. 배가 땅에 닿자 군인들은 먼저 자신들의 보트를 부두 가장자리에 위치한 기둥에 묶어 놓은 뒤 유봄의 오리배를 바로 옆에 밧줄로 묶어 고정했다.
“내리시죠.”
군인들이 지시하자 유봄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가방을 멨다. 봄순이를 심은 화분도 챙겨서 품에 꼭 안았다. 오리배에서 내려 그들을 따라 네댓 층의 계단을 올라가자 회의실처럼 생긴 방이 여러 개 모여 있는 공간이 나왔다. 유봄은 복도를 걸어 가장 안쪽에 있는 꽤 널찍한 방으로 안내되었다. 안내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등 뒤에서는 총을 겨누고 있었기에 그리 친절한 안내라고는 볼 수 없었다.
방 안에는 길쭉한 검은 소파가 낮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놓여 있었다. 군인들은 간단한 총구의 움직임만으로 유봄을 소파에 앉혔다. 방문이 닫히자 선글라스를 낀 중대장이 유봄의 맞은편에 털썩 걸터앉았다. 그리고 무언가를 툭 하고 유봄의 앞으로 던졌다.
“드시죠.”
놀랍게도 그가 던져준 것은 봉지라면이었다. 여기서는 이런 것도 구할 수 있는 건가. 유봄은 잠시 후 자신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정신을 차린 뒤 말했다.
“감사합니다.”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유봄이 해양 유목민 생활을 하며 깨달은 바가 있는데, 모름지기 유목민이라면 기회가 있을 때 무조건 먹어야 한다. 다음에 먹을 날이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노마드의 삶이다. 유봄은 공격적으로 봉지를 뜯고 수프를 뿌린 뒤 마구 부숴서 입에 집어넣었다. 해일이 덮쳐온 그날 이후 처음으로 느껴보는 인공적인 조미료의 맛에 감동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어쩌면 이미 흘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만큼 정신없이 먹었다. 중대장은 유봄이 마지막 가루까지 남기지 않고 입에 털어 넣는 걸 보더니 피식 웃었다.
“다 먹었으면 저기 화장실에서 간단히 씻고 나오시면 됩니다. 옷도 몇 벌 준비되어 있으니 원하는 걸로 입으시고.”
여기는 천국인가.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를 하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아마 건물에 빗물을 받는 물탱크가 있는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까지 수도에서 물이 나올 리 없었다. 비록 찬물밖에 안 나오고 수압이 무척 약했지만 바닷물이 아닌 민물이었고 샤워기도 있었기에 그것만으로도 마침내 잃어버린 인권을 되찾은 기분이었다. 봄순이에게도 화분이 흠뻑 젖을 만큼 물을 적셔주었다.
잠깐 느슨해졌던 유봄이 다시 긴장하기 시작한 건 씻고 나서 갈아입을 옷을 보면서부터였다. 준비된 옷은 하늘하늘한 원피스와 짧은 스커트류 같은 것들이었다. 물론 군인들이 구할 수 있었던 여성 의류가 이것밖에 없었을 수도 있겠지만 요즘 같은 인류 멸망의 시대에 입고 다닐 만한 옷은 결코 아니었다.
유봄은 잠시 고민하다가 몇 가지 대비를 하기로 했다. 저들이 악당일 때와 아닐 때 모두를 대비해야 했다. 먼저 원피스를 입은 뒤 무기가 될만한 물건을 찾았다. 마땅한 물건이 없어 고민하던 찰나 천장의 전등이 눈에 들어왔다. 해일 이후 전기가 없어 불이 들어오지 않았을 테니 일부러 저걸 건드린 사람도 없을 것 같았다. 유봄은 세면대를 밟고 올라가 천장에 달린 전등갓을 조용히 열었다. 다행히 길쭉한 모양의 형광등을 쓰고 있었다. 기대했던 모습 그대로였다. 유봄은 형광등 하나를 분리해서 가지고 내려왔다. 그리고 바닷물에 젖은 자신의 원래 티셔츠와 바지를 물에 빨아서 힘껏 짠 뒤 옷가지 속에 형광등을 숨겼다. 소지품이 들어있는 가방은 어깨에 맸다. 마지막으로 남은 한 손에는 봄순이를 들었다.
어차피 총기에 정면으로 대적할 수는 없었다. 유사시 단 한 번의 기회를 열어줄 정도의 물건이 필요했다. 유봄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 문 앞에 섰다. 긴장된 표정을 얼굴에서 지운 뒤 천천히 문을 열었다. 천국인지 지옥인지 어디 한번 확인해 보자.
방 안에는 아까 봤던 군인 세 사람에 모르는 군인 둘이 더 들어와 있었다. 모두 다섯 사람, 도합 열 개의 시선이 자신에게 꽂히는 것이 느껴졌다. 아까와는 사뭇 달라진 분위기에 잠시 얼어붙었다. 형광등을 쥔 주먹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어두운 실내에서도 여전히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중대장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느닷없이 반말이었다.
“씻고 나니 더 예쁘네.”
그 순간 유봄은 머리 끝까지 소름이 쫙 돋았다. 내가 지옥문을 열었구나. 유봄의 불길한 예감은 불행히도 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것들은 인간이 아닌 짐승들이었군.
“밥도 주고, 옷도 주고. 설마 공짜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