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ve 2. 여름의 타워
“밥도 주고, 옷도 주고. 설마 공짜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그런 말을 할 거라면 애초에 가격표라도 붙여놓던가. 마음속으로 쏘아붙인 뒤 유봄은 중대장을 정면으로 노려봤다. 이럴 때일수록 선글라스 뒤의 시선을 피하면 안 되는 법이다.
“살아 있는 젊은 여자가 드물거든. 보다시피 살아 있는 젊은 남자는 많은데.”
중대장이 변명하듯 말했다. 물론 전혀 변명이 되지 않았다. 유봄은 자신의 소지품 중 이 시대에 가장 쓸모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지갑을 꺼냈다.
“제가 먹은 라면 값이 얼마죠?”
대답이 없자 유봄은 지갑에서 지폐와 체크카드를 꺼내 중대장을 향해 차례로 던졌다. 그러고는 동전 주머니를 연 채로 지갑을 거꾸로 들어 탈탈 털었다. 쨍그랑 하는 금속음과 함께 동전들이 바닥에 흩뿌려졌다. 그 모든 퍼포먼스를 지켜보면서도 미동조차 없던 중대장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처음 해일이 왔을 때 헬리콥터를 타고 재벌이라는 인간이 하나 여기를 찾아왔거든? 뉴스에서도 종종 이름이 나오던 누구나 알 만한 재벌이었어. 그 사람이 돈이라면 얼마든지 줄 테니 자기를 좀 지켜달라는 거야.”
유봄은 이야기를 끝까지 듣지 않아도 이미 결론을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중대장은 기어코 대답하고 싶지 않은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어떻게 됐을 것 같아?”
물론 유봄은 대답하지 않고 중대장을 노려보기만 했다. 어차피 대답을 들을 의사 같은 건 없을 것이었다.
“파격적인 제안에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정성스럽게 상어 먹이 되기 체험을 시켜드렸지. 헬리콥터는 우리가 잘 썼고. 그런 게 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아니겠어? 미친 놈이 다 물에 잠긴 마당에 대체 돈이 무슨 쓸모가 있다고. 돈이라면 뭐든 다 해결되는 세상에서 살다 보니 현실 감각이 없어졌던 거지.”
중대장은 거기서 말을 잠깐 끊었다가 다시 시작했다.
“하지만 너는 우리에게 쓸모가 있는 것을 가졌지. 그러니 안심해. 상어 먹이가 되지 않아도 되니까.”
퍽이나 안심할 일이었다. 유봄은 다시 화장실로 돌아가 문을 잠그고 버텨볼까도 생각해 봤으나 그건 오히려 스스로 퇴로를 차단하는 행위였다. 미약하더라도 희망의 불빛이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했다.
“그럼 중대장님, 저희는 잠시 비켜드리겠습니다.”
군인들은 충성 어쩌고 얼렁뚱땅 이쪽을 향해 경례를 하더니 히죽대며 하나둘 밖으로 나갔다. 중대장은 미동도 없이 앉아 있다가 마지막 군인이 나가고 문이 닫힌 뒤에야 의자에서 일어났다. 촌스러운 선글라스만큼이나 무게 하나는 무시무시하게 잡는 놈이군.
“그냥 편하게 연애하는 거라 생각해.”
이 미친놈이 뭐라는 거야? 하마터면 유봄은 소리를 지를 뻔했다. 대체 뇌가 무슨 재질로 만들어지면 이따위 대사를 생각할 수 있는 거지? 쓸데없이 목소리를 깔아서 유봄은 더더욱 역겨움에 토할 것 같았다. 철컹하고 허리에 두른 탄띠를 벗어둔 채 이쪽으로 걸어오는 중대장의 상의에는 이름표가 달려 있었다. 특이한 성씨였다. 옷에 이름표를 단 채로 이런 짓을 하다니 부끄럽지도 않은가. 한번 던져보자.
“모기철 대위님?”
선글라스가 흠칫했다. 본인 이름 맞구나. 동이가 휴가 나와서 알려준 계급장을 기억하고 있길 잘했다. 다이아몬드 한 개는 소위, 두 개는 중위, 세 개는 대위. 중대장은 약간 불쾌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통성명까지 해야 하나?”
아니, 아까는 연애하는 거라 생각하라더니 통성명조차 거부하는 건 논리적으로 앞뒤가 안 맞잖아? 애초에 이름 같은 건 궁금하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그 점이 더 혐오스러웠다. 아무튼 상대가 잠깐이나마 멈칫했을 때 최대한 흔들어야 했다.
“혹시 여자 친구 있어요?”
“있었지.”
“어머니는요?”
“있었지.”
“떳떳해요?”
“생사도 모르는 사람한테까지 떳떳해야 하나?”
젠장, 안 통하네! 이런 사이코패스 같으니라고! 유봄은 속으로 욕설을 마구 내뱉으며 다음 대응방안을 모색하려 했지만, 미처 방법을 찾기도 전에 중대장의 손이 양 어깨에 닿았다. 유봄의 목소리가 자기도 모르게 다급해졌다.
“그냥 보내주시면 안 될까요?”
“내가 왜?”
“착한 일 한다고 생각하시고.”
이런, 스스로 듣기에도 심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무력한 대사를 말해버렸다. 두려움을 들켜서는 안 되는데. 선글라스 아래에서 중대장의 입이 처음으로 씩 웃었다. 그게 더 무서웠다.
“이런 세상에서는 나 혼자 착한 척하는 게 더 위험해. 내가 널 놔주면 밖에 있는 애들이 날 가만두겠어? 자기 차례만 기다리고 있을 텐데.”
서로 배신하지 못하게 지켜주는 악마들의 연대 같은 건가.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손에 꼭 쥔 형광등을 언제 써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중대장을 어떻게 해결한다 한들 문 밖에서 지키고 있을 군인들을 해결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죽더라도 인간으로 죽겠다. 마지막까지 저항할 것이다.
중대장이 유봄을 만지는 순간 형광등으로 머리통을 후려쳤다. 쨍그랑! 형광등은 너무나 가볍게 깨졌고 중대장은 놀란 표정을 짓긴 했지만 유감스럽게도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영화와 다르잖아! 형광등은 무기가 될 수 없는 거였어!
“악!”
비명을 지르며 깨진 형광등으로 중대장을 찌르려 하는데 중대장이 유봄을 먼저 붙잡아 넘어뜨렸다. 망했다. 계속 소리를 지르며 빠져나가려 해 보지만 중대장의 완력이 상당했다. 별 수 없이 왼손의 화분으로 중대장의 머리를 후려치려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중대장에게 먼저 손목을 잡혀버렸다.
“앙큼한 것.”
중대장은 유봄을 군홧발로 한 번 걷어찬 다음에 툭툭 털고 일어나서 화분도 걷어찼다. 흙이 튀며 봄순이가 화분 밖으로 떨어졌다.
“봄순아!”
유봄의 비명을 들으며 중대장은 그대로 봄순이를 밟아 짓이겨버렸다. 유봄의 마음도 봄순이처럼 짓이겨졌다.
그때였다. 밖에서 우당탕탕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하수진 중위님!”
그렇게 불린 사람이 방에 난입하자 뒤이어 아까의 군인들이 쫓아 들어왔다. 하수진 중위가 말했다.
“모 대위님, 지금 뭐 하시는 거죠?”
일순 정적이 흘렀다. 중대장, 아니 모기철 대위는 하수진 중위를 한참 응시하다가 날카롭게 대꾸했다.
“어디 군인권센터에 신고해 보시든가.”
그 말에 다른 군인들의 피식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와 소름이 끼쳤다. 하수진 중위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모기철 대위를 밀치고 유봄을 부축해 일으켰다. 그리고는 천천히 뒷걸음질치며 방어하듯 유봄을 자신의 뒤에 세웠다. 하수진 중위가 빠르게 속삭였다.
- 네 시 방향 문을 열고 계단으로 달려서 19층에서 나가요. 거긴 오늘 막 재입대한 애들이 대기 중이니까 괜찮을 거야. 통과해서 직진하면 부두가 있어. 거기서 뭐든 타고 살아남아요.
빠르고 간명한 지시. 군인다웠다.
“하 중위, 험한 꼴 보기 싫으면 비키지?”
“모 대위님이나 그만하시죠.”
“이게 미쳤나! 지금 그거 하극상이야!”
중대장이 거칠게 으르렁거렸다. 점점 인내심이 바닥나고 있다는 뜻이었다. 유봄은 그 말을 신호로 삼아 뛰었다. 모기철 대위가 먼저 움직일 때까지 기다려줄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오히려 하수진 중위가 당황했다.
“아니? 그쪽이 아니라!”
사실 유봄이 뛴 방향은 계단이 아니라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 입구 쪽이었다. 방향을 착각한 건 아니었다. 목표는 탁자였다. 유봄은 아까 중대장이 탁자 위에 벗어둔 탄띠를 재빨리 집어 들고 거기서 권총을 꺼냈다. 쏠 줄은 모르지만 쏠 수는 있겠지. 어떻게든 말이다. 이번에는 중대장을 비롯한 다른 군인들이 당황한 신음소리를 냈다. 유봄은 다시 네 시 방향으로 달려 철문을 열었다. 알려준 대로 계단실이었다. 유봄은 계단실로 뛰어들었다.
“비켜!”
모기철 대위가 하수진 중위를 거칠게 밀치면서 쫓아왔고 공포영화의 한 장면처럼 닫히는 철문 사이로 덥썩 손을 밀어넣었다. 유봄은 철문을 잡은 그 손을 보며 오히려 기회라고 생각했다. 앞뒤 생각할 것 없이 온몸을 던져 있는 힘껏 철문을 밀어 닫았다. 모기철 대위의 손이 문틈에 끼며 그의 비명이 터져나왔다.
“악!”
이건 봄순이에 대한 복수다!
마음속으로 힘껏 외쳤다. 등 뒤로 철문이 저절로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유봄은 숨 쉴 틈도 없이 계단을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잡아!”
철문 너머 평정심을 잃은 모기철 대위의 목소리가 들렸다. 계단실에는 불빛이 하나도 없었다. 유봄은 감에 의존해 최대한 빠르게 계단을 내려가려 했지만 자꾸만 벽에 몸이 부딪혔다. 난간을 찾아 더듬거리며 내려가다가 아래층 철문을 만났다. 유봄은 철문을 활짝 열고 지갑을 문틈 사이에 꽂아넣었다. 그러자 열린 문으로 빛이 새어 들어오며 계단실을 밝히기 시작했다. 지금 이 세상에서 가장 쓸모 없던 물건이 쓸모를 되찾은 순간이었다.
아슬아슬 몇 계단을 뛰듯이 내려가서 마침내 19층 표지판을 만났다. 유봄은 문을 벌컥 열었다. 여기에도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단체로 모여 있었다. 그들은 모두 동시에 유봄을 쳐다보았다. 원피스를 입고 권총을 손에 든 유봄은 지금 이곳에서 너무나 튀는 존재였다. 안 쳐다보는 게 이상했다. 군인들은 도란도란 간식 시간이라도 가지고 있었는지 곳곳에 과자 박스가 쌓여 있었다. 유봄은 냅다 눈 앞에 있는 과자 봉지 몇 개를 집어들고 그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과자에 권총에 원피스까지 3종 선물 세트다, 이것들아!’
모두의 시선을 강탈하며 코너에 도달하자 부서진 유리창이 보였다. 아까 배를 댄 곳이었다. 저 끝에 유봄의 오리배도 처음 모습 그대로 정박되어 있었다. 동력 보트냐, 무동력 오리배냐? 조종을 할 수만 있다면 당연히 동력 보트여야 하지만 과연 유봄은 시동이라도 걸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이후로도 연료를 계속 구할 수 있을 것인가? 선택의 순간이었다.
“봄아!”
어? 누가 내 이름을? 원피스를 팔랑거리며 반사적으로 뒤로 돌자 군복들 사이에서 아는 얼굴이 하나 삐죽 튀어나왔다.
“동아!”
오랜 동네 친구 한동이었다. 살아 있었구나. 너무나 반가웠지만 상황을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가서 손목을 잡아끌었다.
“따라 나와!”
“뭐? 무슨?”
“거기 서!”
모기철 대위가 쫓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한동도 유봄의 복장과 몰골을 보고 대충 상황을 눈치챈 듯했다. 유봄이 재촉했다.
“설명은 나중에! 지금 바로 가야 해!”
“봄아, 어서 가. 내가 어떻게든 막아볼게.”
“동아!”
한동은 유봄에게 등을 보인 채로 고개만 돌리며 미소 지었다.
“봄아, 또 보자.”
유봄은 오리배를 선택했다. 밤이었고, 이 시대에 조명은 없었다. 한동이 조금만 시간을 벌어준다면 별빛 속에 숨을 수 있을 것이었다. 해일 이후 지금까지 유봄에게는 수많은 선택의 순간들이 있었고 그 모든 선택들이 유봄을 여기까지 밀고 왔다. 그리고 결국에는 살아남게 만들었다. 비록 선택하지 않은 길을 가볼 수는 없었지만 많은 경우 생사의 갈림길이었으리라. 말하자면 지금 이 순간 살아있는 유봄은 올바른 선택들의 총체라고 할 수 있었다. 유봄은 이번에도 자신의 선택이 옳았기를 마음속 깊이 바라며 힘껏 페달을 밟았다.
<작가의 말>
7~8화는 이 소설에 꼭 필요한 장면일까에 대해 여러 겹의 고민과 수정을 거듭한 끝에 내놓게 되었습니다. 만약 인류에게 재앙이 닥친다면 여성에게 더 가혹할 것이다, 라는 전제 하에 결국 쓰기로 결심했지만 불쾌한 장면을 정성껏 쓴다는 건 정신적으로 무척 괴로운 과정이네요. 전 아마 범죄소설 같은 걸 쓰기는 틀린 것 같습니다. 하하.
만약 정말로 인류에게 어떤 재앙이 닥친다면 소설보다 현실에서 더 인간다운 모습이길 바라며. 비록 제가 창조한 가상의 인물이지만 힘들고 무서웠을 주인공 유봄이에게도 미안한 마음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