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ve 3. 가을 노인
와아아! 함성 소리가 들리며 요트, 아니 해적선들이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빠르게 오리배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혹시 다 말장난이었고, 처음부터 이 순간만을 기다려온 것 아닐까?’
오리배를 포위하듯 맴돌기 시작하는 해적선들을 바라보며 유봄은 마음을 가다듬었다. 포위망이 촘촘해서 오리배의 속도로는 도저히 빠져나갈 방법이 없을 것 같았다. 결국 총을 활용해야 했다.
유봄은 검지손가락을 권총 방아쇠에 걸며 생각했다.
‘내가 정말 총을 쏠 수 있을까?’
태어나서 총이라고는 놀이공원에서 인형을 쏘아 맞혀본 게 전부였다. 과연 살아있는 사람을 똑바로 겨냥할 수 있을까? 그리고 방아쇠를 당길 수 있을까? 하지만 곧 유봄은 첫 질문을 정정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과연 이 총이 나가긴 할까?’
유봄은 중대장의 총을 실제로 사용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단지 총을 겨누는 퍼포먼스만 해도 물러나는 상대 앞에서 굳이 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쏘는 방법이 맞는지도 확신이 없었다. 장전하는 방법이 틀릴 수도 있었고 손질이나 보관이 잘못되어 총알이 안 나갈 수도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한 번 연습 삼아 쏴보는 건데….
해적들은 총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는 전혀 위협을 느끼지 않는 이들이었다. 유봄은 총알이 실제로 나가는지도 확인해볼 겸 방아쇠를 한번 당겨보기로 했다. 가장 가까운 해적선을 겨냥했다.
탕!
처음 쏴본 권총의 소리와 반동이 생각보다 훨씬 커서 쏜 유봄이 더 깜짝 놀랐다. 팔 전체에 저릿한 충격이 왔다. 이게 진짜 나가는구나! 남은 총알은 다섯 발. 해적들은 멈칫 하는 기색도 없이 배를 계속해서 움직이며 포위망을 좁혀 왔다.
“아가씨! 대체 뭘 쏘고 있는 거야?”
“경고사격이거든요!”
해적 선장의 노골적인 비웃음에 대꾸한 뒤 유봄은 또다시 질문을 정정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쏘더라도 과연 내가 목표물을 맞힐 수 있을까?’
바람이 불고 파도가 높았다. 오리배도 파도에 흔들리고 해적들의 배도 흔들렸다. 이런 상황에서도 총으로 사람을 직접 겨냥할 자신은 없었지만 어차피 맞힐 가능성이 별로 없어 보였다. 초보자는 평지에서도 손이 흔들려 맞히기 힘든 것을 움직이는 배 위에서 어떻게 맞힐 수 있을까.
유봄은 다가오는 해적선에 구멍이라도 낼 요량으로 배 하부를 향해 탕! 탕! 두 발을 쏘았다. 총알이 보이지 않아 맞았는지 안 맞았는지조차 알 수 없었지만 해적들의 반응을 보건대 전혀 안 맞은 것 같았다.
“뭐야? 이제 기도하냐?”
아, 그렇구나. 유봄은 해적 선장의 비꼬는 말에서 오히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깨달았다. 스스로 생각해도 자세가 무척 어정쩡했다. 총의 흔들림과 반동을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마치 기도하듯 가슴에 손을 모은 자세로 총을 쏴버린 것이다. 유봄은 영화에서 본 사격 장면들을 떠올리며 손을 쭉 뻗어 시선과 총을 일직선 높이로 맞추었다. 남은 총알은 세 발, 이제부터는 꼭 필요한 곳에 정확한 사격을 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때 유봄의 오리배 뒤쪽에서 촤르륵 물소리가 났다. 뒤로 돌자 미역처럼 헝클어진 머리칼의 해적 하나가 순식간에 오리배 위에 올라탔다. 수영을 해서 유봄의 배에 접근했던 것이다.
‘상황을 질질 끌면 안 되는 거였어!’
곧바로 몸을 돌려 총을 쏘려고 하는데 총을 든 손이 해적에게 잡혔다. 해적은 오직 한 팔의 완력으로 유봄의 손을 들어 올려 총구가 하늘을 향하게 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허리춤에 찬 식칼을 빼어 들었다. 마치 먹이를 사냥하는 야수처럼 매서운 눈을 가지고 있었다. 위험했다. 이번에는 유봄이 식칼을 든 해적의 팔을 다급히 잡았다.
유봄은 야수 같은 해적과 좁은 오리배 위에서 마치 왈츠를 추듯 양 손을 맞잡고 실랑이를 했다. 유봄이 날아드는 식칼을 피하며 총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꽉 움켜잡는다는 게 그만 탕! 하고 총알이 격발되었다. 그리고,
“악!”
외마디 비명소리가 났다.
눈앞의 해적이 낸 소리도 유봄의 비명소리도 아니었다. 놀랍게도 총구가 향한 방향의 끝에서 해적 선장이 다리를 부여잡고 뒹구는 게 보였다. 발사된 총알이 선장의 다리에 맞은 것 같았다. 소 뒷걸음치다 해적 선장을 잡은 격인가.
“선장님!”
유봄은 붙잡힌 팔의 완력이 느슨해지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놀란 해적이 잠깐 방심한 틈을 타 손을 뿌리치고는 곧바로 그의 머리를 권총 손잡이로 있는 힘껏 내려쳤다.
이 유려하고 단호한 동작은 지난 롯데타워의 교훈이라 할 수 있었다.
첫째, 적의 머리를 칠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으니 칠 수 있을 때 가장 강력한 수단으로 사력을 다할 것!
둘째, 머리를 치는 것만으로 상황이 끝나지 않을 수 있으니 쉬지 않고 다음 공격을 이어갈 것!
유봄은 해적을 발로 걷어차 거리를 벌린 후 찰칵 총을 겨눴다. 빠른 어조로 위협했다.
“이 거리에서 쏘면 못 맞히기가 더 힘들지 않을까요?”
머리를 부여잡은 해적이 유봄을 노려봤다. 유봄은 총구를 까딱하며 오리배에서 내리라고 손짓했다. 해적은 유봄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서서히 뒤로 이동했다. 여전히 매서운 눈빛이 살아 있었다. 햇빛이 그의 식칼에 반사되어 번뜩였다. 아직도 기회를 보겠다는 건가? 유봄은 오늘의 교훈을 하나 더 추가했다.
셋째, 위기 상황을 질질 끌지 말 것!
“3초 안에 내리시지 않으면 그냥 쏠게요. 하나, 둘,”
그제야 해적이 바다로 첨벙 뛰어내렸다. 됐다! 단순히 운만으로 반년을 생존한 건 아니라고!
“셋!”
유봄은 굳이 해적이 뛰어내린 바다를 향해 경고 사격을 한 발 더 했다. 실제로 쏠 의지가 있었음을 시위하듯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다가오는 다른 해적들에게도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남은 총알은 단 한 발.
“뭐 하는 거야? 어서 저 여자 잡아 죽여!”
해적 선장이 괴로운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유봄은 총을 든 채 긴장을 풀지 않고 주변을 경계했다. 그때 유람선 위에서 덩치 큰 해적 하나가 선장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야, 그 다리로 선장 하겠어?”
“이게 미쳤나?”
“약한 놈은 물고기 밥이라고 네가 물에 던진 동료가 몇 명이었지? 그런데 이제 네가 약한 놈이 됐네.”
“얘들아! 이 새끼 잡아!”
하지만 다른 해적들도 모두 조용히 사태를 지켜보고 있을 뿐 아무도 선장의 말을 듣지 않았다.
“널빤지 처형 좋아하시네. 네가 오늘 아침에 던진 건 내 동생이야, 이 자식아!”
그 말과 함께 선장을 퍽 소리가 나도록 때리자 말리는 사람, 그 말리는 사람을 때리는 사람, 그 때리는 사람을 밀치는 사람이 뒤엉켜 순식간에 난리통이 되었다. 해적들은 패가 갈려 싸우기 시작했고, 다른 배에 타고 있던 해적들마저 요트에 올라타 싸움에 합류했다.
내분이었다. 조금 전 유봄을 공격하던 헝클어진 머리의 야수 같은 해적도 어느새 유람선에 올라타 선장을 지키면서 이단 옆차기를 하는 것이 보였다. 순식간에 벌어진 이 모든 사태가 마치 한 편의 블랙 코미디 같았다.
‘이 장면 어디서 봤더라?’
유봄에게 뜬금없는 기시감이 찾아왔다.
아, 어릴 때 가족들과 함께 보러 간 야구 경기에서 있었던 벤치 클리어링. 갑자기 양쪽 벤치에 앉아 있던 선수들이 동시에 우르르 몰려나와 육탄전을 벌이던 그 장면. 오래전 야구장에 앉아 치킨을 먹다가 생생하게 목격한 그날의 사건이 느닷없이 떠올랐다. 그날 아빠가 하필 이런 경기 보여줘서 미안하다고 사과했었는데…. 이젠 아무도 사과하는 사람이 없네.
해적들이 더 이상 유봄을 보고 있지 않을 때 유봄은 오리배의 페달을 힘껏 밟았다.
아침저녁으로 날이 제법 선선해질 무렵 유봄은 영등포에 도착했다. 먼 곳의 나뭇잎은 어느덧 단풍으로 곱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지구온난화의 시대에도 가을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해수면이 거의 옥상 부근까지 찰랑찰랑한 타임스퀘어 간판을 보자 비로소 서울의 지하철 2호선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항해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지하철을 탔더라면 반나절만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를 무려 한 계절이 걸려 도착하게 된 것이다.
영등포는 아파트나 건물 높이들이 모두 애매했다. 대개 한두 개 층이 수면 위에 올라와 있었는데 이곳에는 생존자가 별로 없는 것처럼 보였다. 노마드 한둘이 멀리서 경계하며 지나갈 뿐이었다. 고층 건물이 적어 생존자 자체가 적은 것인지 아니면 생존자들이 이곳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떠나버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영등포에서 맞이한 첫 아침에는 짙은 안개가 유난히 자욱했다. 유봄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갯속에서 애매한 높이의 건물들을 피해 다니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안개 사이로 흐릿한 그림자가 보였다. 마치 바다 위에 사람이 서 있는 것 같은 형상이었다. 하얀 안개 위에 누군가 먹을 갈아 붓으로 엷게 그림을 그린 것처럼 실루엣만 보이는 몽환적인 풍경이었다.
오리배의 페달을 찌그덩대며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니 해수면과 비슷한 높이의 건물 옥상에 노인이 하나 서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하얗게 샌 장발과 길게 기른 수염이 마치 옛날이야기에나 나올 법한 산신령처럼 보였다. 너무나 비현실적인 장면이었다.
그는 뒷짐을 지고 유봄이 오는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유봄은 다른 방향으로 핸들을 돌려 회피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그렇게 위협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한 폭의 수묵화 같은 신비로운 풍경에 압도되어 ‘그래서 뱃사공은 산신령을 만났답니다’ 하는 느낌으로 유봄은 오리배가 그에게 흘러가도록 두었다. 목소리가 들릴 만큼 충분히 거리가 가까워지자 노인이 입을 열었다.
“유봄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