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ve 3. 가을 노인
어제 너무나 맛있게 먹었던 음식을 오늘 완전히 똑같이 먹게 된다면 어떤 기분일까? 전날보다 그 감동이 덜할까?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조금은 질리는 게 당연한 걸까?
적어도 유봄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노릇노릇 구워진 생선과 따끈따끈한 흰 쌀밥을 다시 만난 유봄은 행복했다. (사실은 같은 날이지만) 이틀 연속 훌륭한 식사를 할 수 있음에 감사했고, 오히려 전날 허겁지겁 먹어치우느라 충분히 음미하지 못했던 세세한 맛을 하나하나 발견하는 감동이 있었다. 노인은 그 모습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설명을 시작했다.
“이 세계에서 무한히 반복되는 1년은 1월 17일, 그러니까 해일이 몰려오는 순간부터 시작돼. 나는 해일이 시작되면 곧바로 이 건물까지 달려와서 옥상에 오르지. 그리고 파도의 모서리에서 하루를 되돌려 해일이 발생하기 전날로 돌아가는 거야. 그러고 나서 마트와 편의점을 돌며 1년 치 식량과 생존에 필요한 도구들을 여기에 쟁여놓고 다시 해일을 맞이하게 되지.”
“그래서 무려 가스버너까지 챙겨놓을 수 있었던 거군요.”
그런 방식으로 모서리를 사용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기발한 착상이었다. 게임으로 치면 치트 키(Cheat Key)인 셈이었다. 그런데 만약 이 세상에서 1년에 딱 하루 치트 키를 쓸 수 있게 된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유봄은 노인의 말에 잃어버린 가족과 친구들 생각이 먼저 났다.
“혹시 그 시간을 이용해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구할 수 있지. 나도 처음 여러 해 동안은 필사적으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노력해 봤어. 대부분 해일이 닥치기 전까지는 내 말을 믿지 않았지만 몇몇은 나와 함께 살아날 수도 있었지. 하지만 그들은 결국 나와 함께 과거로 돌아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내가 열 번을 구하든 스무 번을 구하든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어.”
“같이 돌아갈 수가 없다고요?”
“그래, 파도의 모서리를 이용해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건 단 한 사람, 모서리를 사용하는 주체야. 그러니 결국 때가 되어 1년이 다시 시작되면 그들은 처음과 똑같은 상태로 돌아가 죽음을 맞이하게 돼. 내가 돌아간 과거에서 만날 수 있는 건 ‘내가 구하기 전의 사람들’뿐인 거지. 그러니까 그들을 구하는 건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해답이 아니야. 영원히 반복되는 죽음의 굴레를 벗어나려면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야만 해.”
결연히 말하는 노인의 표정이 어딘가 쓸쓸했다. 지난해 목격한 죽음을 올해도 똑같이 목격하게 되는 건 어떤 기분일까? 저 허망한 표정은 몇 년 동안 몇 번이나 반복해온 걸까?
“해일이 발생하기 전날로 돌아갈 수 있다면 더 중심부의 모서리에서는 더 앞선 과거로도 갈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면 더 많은 준비시간을 벌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해봤는데 안 돼. 그 어느 모서리에서도 해일 전날보다 빠른 시점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어. 아마 그날이 모든 일의 시작점인 거 같아. 물론 추가적인 다른 실험을 해볼 수도 있겠지만 이제 나에게는 남은 시간이 별로 없어. 이 무한히 반복되는 지옥 같은 1년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선택과 집중을 해야만 해.”
무한히 시간을 되돌릴 수 있으면서 정작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니? 유봄은 노인의 말에 무언가 모순이 있다고 느꼈다.
“설마, 시간을 되돌렸을 때 몸은 지금 모습 그대로인 건가요?”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질문이 다소 이상했지만 노인은 이미 유봄이 무엇을 묻는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시간을 되돌린다는 건 되돌린 주체를 제외한 나머지 세계 전부가 과거의 시간대로 돌아간다는 거야. 이때 되돌린 주체는 미래의 상태에 머물러야 하지. 함께 과거로 돌아가버리면 ‘기억이 지워지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그리고 과학적으로 새삼 확인하게 된 건데 인간의 의식은 결코 몸에서 분리될 수 없어. 몸이 미래의 몸 그대로 남아있어야 미래의 기억도 남아있을 수 있는 거야. 결국 모서리에 남아있다는 것은 세상이 모두 초기화될 때 혼자서 초기화되지 않고 늙어간다는 뜻이지.”
“그러니까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가는 셈이군요.”
“유봄이 너는 늘 그런 식으로 이해하더구나. 정확한 개념은 아니지만 편한 대로 이해하거라.”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죠?”
“솔직히 말해 왜 벌어지는지는 알 수 없어. 우리는 다만 벌어지고 있는 일을 분석할 수 있을 뿐이지.”
거기까지 들은 유봄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노인도 이야기를 중단했다. 유봄에게는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고 노인도 그것을 아는 것 같았다. 노인은 일어나서 믹스 커피를 타기 시작했다. 달큰한 김이 모락모락 솟아오르는 커피 잔이 유봄 앞에 놓였다. 목구멍으로 한모금 넘기자 감동이 한가득 밀려왔다. 인류 최후의 믹스 커피를 맛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더더욱 사명감을 가지고 마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중하게 그 달콤쌉싸름한 맛에 온전히 집중하다 보니 머리에 다른 생각이 침투할 겨를이 없었다. 역시 커피도 마약의 일종인 것이다. 커피를 홀짝이며 공상에 빠진 유봄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던 노인이 다시 말을 꺼냈다.
“한 가지 가설이 있어.”
“뭐죠?”
“물론 아직은 공상에 불과한 내용이지만. 먼저 사실관계를 한번 짚어 보자. 빙하가 완전히 녹기 전에는 이런 현상이 세계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어. 그리고 아까 말했듯이 해일 전날보다 빠른 시간대로는 돌아갈 수가 없었지. 즉, 이 현상은 최후의 빙하가 녹은 뒤에 생겨난 거야. 그렇다면 빙하가 녹으면서 빙하 아래 동결되어 있던 무언가가 깨어난 거라고 생각하는 게 합리적이지. 그게 뭔지는 아직 모르지만 시간을 복제하는 것으로 봐서 4차원적 형태의 생명체 같은 거라고 가정해 보자.”
“4차원 생명체요?”
갑자기 이건 또 무슨 안드로메다 은하로 멍멍이들이 날아가는 소리지?
“결국 인간은 4차원을 인식하지 못해서 ‘시간’이라고 착각하는 것에 불과하거든.”
노인은 하얀 A4용지를 한 장 꺼내더니 검은색 사인펜으로 최하단에 긴 가로줄을 하나 그렸다.
“이건 1차원 세계에 사는 ‘선(線)’이야. 1차원의 선은 2차원 세계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세상을 선으로만 이해할 수 있어. 따라서 1차원의 선이 자신의 관점에서 ‘면(面)’이라는 것을 인식하려면 시간이 흐른 것이라고 느껴야만 할 거야. 즉, 이 1차원의 선에 시간이 쌓이면 2차원의 면이 되지.”
노인은 가로줄 위에 무수한 가로줄을 쌓아 A4 용지의 한 면을 가득 채웠다.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2차원의 면에 시간이 쌓이면 우리가 사는 3차원의 공간이 만들어지는 거야.”
노인은 검은색 사인펜으로 칠한 A4 용지 위에 무수한 A4 용지를 쌓아 상자 높이의 더미를 만들었다.
“그럼 이 3차원 공간에서 우리가 시간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을 쌓으면 어떻게 될까? 그것이 바로 4차원의 ‘시공간’이 되는 거야. 이 4차원의 세계에서는 시간이라는 것도 결국 이동할 수 있는 하나의 좌표에 불과해. 우리에게 3차원의 공간이 시간을 들여 이동할 수 있는 좌표에 불과한 것처럼 말이지.”
노인은 A4용지 더미 옆에 다른 더미들을 올려놓았다. 똑같은 높이의 종이 더미들이 여러 개 쌓였다.
“인간은 3차원 생명체이기 때문에 지구의 ‘공간’을 점유하면서 증식해왔다면 그 4차원 생명체는 지구의 ‘시간’을 점유하면서 증식하는 거야. 말하자면 시간을 복제해서 새로 생성하는 게 이 생명체의 번식 방법인 셈이지.”
유봄은 인상을 찌푸렸다. 노인의 4차원 퍼포먼스는 훌륭했지만,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웠고 증거도 없었다. 하지만 노인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떠드는 게 아니라 적어도 파도의 모서리에서 경험한 것을 토대로 세운 가설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유봄도 모서리에서 무수히 존재하는 동일한 시간의 더미들을 보았으니까. 파도의 모서리를 직접 경험하지 않았다면 노인의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까 노인은 ‘우리는 다만 벌어지는 일을 분석할 수 있을 뿐’이라고 했다. 물론 과학자들에게는 분석 그 자체가 중요한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유봄에게는 언제나 분석보다 행동이, 이론보다 실천이 중요했다. 인류는 지구온난화에 대해서도 무수한 분석을 내놓았지만 결국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 기후 변화의 모서리로 내몰리기 전에 실천을 했어야 했다.
유봄은 질문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면 되죠?”
노인은 책상 위에 서울 지도를 펼쳤다. 지도에는 거미줄 모양으로 뻗어 있는 파도의 모서리 좌표가 표시되어 있었다. 각 모서리에는 ‘D-1, D-28, D-154’처럼 되돌릴 수 있는 날짜가 적혀 있었다. 노인은 단호하게 거미줄의 중심부를 가리켰다. D-365가 적혀 있는 그곳은 군인들이 장악하고 있는 그곳, 유봄이 도망쳐 나온 잠실 롯데타워였다.
“이 모든 모서리의 중심부. 누가 봐도 이곳에 답이 있을 것 같지 않니? 여기에 가면 이 차원의 거미줄을 만든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걸 파괴하면 우리는 이 반복되는 시간대를 탈출할 수 있을지도 몰라.”
“아하, 무려 4차원 거미와 싸워야 하는 상황인 거군요.”
유봄은 농담으로 받아치고 싶었지만 노인은 진지했다.
“그렇지. 하지만 만약 이곳에 그 4차원 생명체가 없다면 모서리를 이용해 1년 전 이 사태가 발생하는 순간으로 돌아가는 거야. 어쩌면 그때가 이 괴생명체가 나타나는 순간일지도 몰라. 그때는 곧바로 나에게 와서 다음 작전을 시작하면 돼. 네가 만약 모든 것이 시작되는 봄에 이곳으로 온다면 다음 작전을 결행해야 하는 순간이라고 이해할게.”
노인의 사명감 넘치는 눈빛을 마주하자니 마치 자신이 지구를 구하는 영웅이라도 된 것 같아 부담스러웠다.
‘저는 그냥 졸업을 준비하던 평범한 대학생이라고요, 과학자 교수님. 그리고 사실 저는 지금 가장 궁금한 질문이 하나 있답니다.’
유봄은 노인의 타오르는 눈빛을 슬쩍 피하며 질문했다.
“혹시 이전에 경험한 서른두 번의 다른 우주에서는 어떻게 되었나요? 이미 여러 번 시도해본 것 아닌가요?”
“사실 나는 결과를 몰라. 너는 단 한 번도 다시 돌아온 적이 없으니까.”
“뭐라고요? 당신은 저와 같이 안 가시는 건가요?”
유봄은 충격에 소리를 질렀다. 저 험한 전쟁터 같은 곳으로 나만 혼자 보내고 자기는 편안하게 햄이랑 참치나 까먹으며 여기서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이건 정말이지 너무나 비겁하고 치사한 겁쟁이 과학자 노인이 아닌가? 하지만 노인은 다시 한번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같이 못가.”
“아니, 대체 왜죠?”
“이건 관찰자가 있어야 검증이 가능한 가설이야. 같이 실험 대상이 될 경우 실패해서 둘 다 기억이 리셋됐을 때 검증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어. 누군가 관찰자로 남아야 실험을 진전시킬 수 있는 거야.”
“그러니까 하필이면 제가 실험체이고 당신이 관찰자라는 거군요. 매번 가설을 수정하면서 저를 이용해 테스트를 하고 있다는 거고.”
“맞아. 정확히 이해했어.”
유봄은 순간 ‘이 사람 물어버릴까?’ 하고 생각했다. 극한의 환경을 경험하며 단련된 인내심으로 가까스로 참아냈지만. 노인이 말을 이었다.
“넌 이 질문도 이미 여러 번 했어. 사실 단 한 번도 시원하게 납득하진 못했지. 하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아마 나는, 그러니까 내가 아는 나라면 이미 다른 복제된 다중우주에서는 너와 같이 가서 가설을 직접 확인하려는 시도를 해봤을 거야.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내가 잘 알아.”
“그럼?”
“아마 어떤 이유로든 실패했겠지. 물론, 순수하게 지금이 서른세 번째일 수도 있지만, 아닐 확률도 부정할 수는 없어. 내가 너를 따라갔다가 이미 수백 번 수천 번의 기억이 초기화되었고 수천 년의 세월이 반복되었을지도 몰라. 그 다중우주의 내가 어떻게 되었는지 관찰해줄 수 있는 관찰자가 없기 때문에, 거기서는 내가 대상이기 때문에 진실은 영원히 알 수가 없어. ‘슈뢰딩거의 고양이’ 같은 문제지. 이 사고실험에서는 관찰자가 상자를 열고 관찰하기 전까지 고양이는 죽어 있지도 살아 있지도 않은 상태로 다중우주가 중첩되어 있어. 관찰자가 상자를 연 순간 고양이의 삶과 죽음이 확정되지. 하지만 이 모든 실험이 내가 고양이일 때는 아무 소용없게 되는 거야.”
그럼 나는 고양이가 되어도 상관없다는 건가요? 죽을지 살지 아직 확정되지 않은 고양이 취급을 받게 된 유봄은 이대로 노인을 할퀼까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이 노인네 무서운 말을 과학적으로 하는 재주가 있네.
“내가 원래 성향과 달리 관찰자로 남겠다는 결론에 이른 이번 우주는, 어쩌면 수천 번의 반복된 실패에서 얻은 작고 소중한 변화일지도 몰라. 그러니까 이번 우주에서는 불확실한 확률에 모든 것을 거는 것보다, 내가 기억을 유지한 채로 늙어 죽을 때까지 최선을 다해 너를 그곳으로 보내는 게 성공 확률이 더 높은 베팅이라고 생각해. 너에게 매번 조금씩 다른 가설과 방법을 제안해 주면서 말이지.”
영원히 증명할 수 없는 문제를 가지고 저렇게까지 과학적으로 진심인 사람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솔직히 말해 이제 유봄은 화낼 힘도 빠져버렸다. 어차피 저 노인이 실험체라 부르든 고양이라 부르든 유봄은 엄연히 자기결정권을 가진 인간이었다. 스스로의 판단으로 노인의 주장을 해석하고 자신의 미래와 운명을 결정하면 될 뿐이었다. 당면한 문제부터 해결해 보자.
“그런데 아까는 제 오리배를 떠내려 보내라고 하더니, 그러면 대체 무슨 수로 잠실까지 가나요?”
“겨울이 되면 탐사조가 너를 태우러 돌아올 거야. 그때 탐사조와 함께 출발하면 돼.”
그럼 교통수단도 해결되었고, 마지막으로 궁금한 게 하나 있었다.
“그런데, 당신이 저를 처음 만났을 때는 33년 전의 몸이었겠네요?”
추월 노인이 멈칫했다.
“그 질문을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군. 맞아. 그때만 해도 스물 아홉이었지.”
“그래요? 그럼 지금은 생각보다 노안이시군요.”
“수염을 안 밀어서 그래!”
발끈하는 노인을 보며 유봄은 소심한 복수를 달성했다는 통쾌함을 느꼈다. 그리고 진짜 마지막 질문.
“그러면 혹시, 우리가 사랑했던 우주도 있나요?”
추월 노인은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그저 유봄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것으로 대답은 되었다.
“좋아요, 갈게요. 이번에는 꼭 성공할게요!”
추월 노인은 어딘가 슬픔이 묻어 있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봄은 그런 노인을 향해 한 마디를 덧붙였다.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