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이, 익명의 미국인 이야기 - 35
2012년 가을, 스트레이는 시카고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추운 날씨를 피해서 다시 떠나기 위해 무임승차를 했다가 체포되었다.
이번에는 플로리다의 영장보다도 열여섯 살 때 시카고의 한 가게에서 물건을 훔쳤던 일이 더 문제가 됐다. 스트레이는 구류 선고를 받고 구치소에 머물러야 했다.
석방되었을 때는 시카고에 이미 겨울이 찾아와 있었다. 춥고 눈이 내리는 날씨에 사방이 뚫린 화물열차를 타기는 어려웠다. 길에서 겨울을 날 수도 없었다. 스트레이는 고등학교 때 가장 친했던 친구 두 명에게 도움을 청했고, 친구들의 집 소파에서 머물게 되었다.
노숙을 하는 이상 계속 구치소를 들락거리게 된다. 먹을 것을 훔치다가, 화물열차에 숨어 타다가 체포된다. 또는 그저 노숙인이기 때문에 이유 없이 검문을 당한다. 이유가 무엇이든 경찰이 불러 세우는 순간 플로리다의 영장 때문에 그 자리에서 구속되어 구치소에 간다. 스트레이는 그런 생활이 지긋지긋했고, 그래서 노숙을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정착해서 제대로 된 삶을 살면 이유 없이 검문당할 일도 없기 때문이었다. 또 약물중독에서도 벗어나고 싶었다. 노숙을 하면서 불안정하게 살면 중독에서 벗어나기도 어렵다.
시카고에 돌아와서 생활을 꾸려나가기로 한 이유 중에는 향수도 있었다. 스트레이는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살기 좋은 곳에 많이 가 봤고 콜로라도 주, 펜실베이니아 주, 캘리포니아 주 오클랜드에는 잠시 정착한 적도 있었다. 특히 오클랜드는 시카고와 공통점이 많으면서도 날씨가 훨씬 좋았기 때문에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럼에도 시카고를 대신할 수는 없었다.
스트레이는 항상 시카고에 강렬한 그리움을 느꼈다. 무엇이 가장 그리웠는지 물었더니 스트레이는 두 가지를 꼽았다.
하나는 다양성과 조화가 공존하는 시카고 남부의 삶. 시카고 남부에서는 매우 많은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 자리를 잡고, 탄탄한 지역사회 공동체를 기반으로 살아간다고 한다. 한때 스트레이가 단골이었던 식당의 사장 부부가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부인은 한국 출신, 남편은 폴란드 출신이다. 한국과 폴란드의 음식을 결합한 독특한 퓨전 식당으로 크게 성공한 후 다른 종류의 가게도 여러 곳 열었다. 그리고 그 성공을 지역사회에 돌려주고 있다. 문화센터도 지었고, 팬데믹으로 실직한 사람이 한창 많았던 시기에는 퓨전 식당의 영업을 오랫동안 중단하고 대신 그곳에서 매일 누구에게나 무료로 점심을 나눠줬다.
꼭 성공해서 베풀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문화를 지키는 동시에 다른 문화의 사람들과 공동체를 이룬다. 동네 사람들끼리 한 블록을 통째로 막고 각자 집 앞에서 바비큐를 해서 음식을 나눠 먹는 블록 파티block party가 흔하다고 한다.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서로를 존중하고 도우며 살아가는 것은 ‘이민자들의 나라’로 불리는 미국의 이상이다. 그러나 그 이상이 실현된 곳은 시카고 남부를 포함한 소수의 지역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다른 하나는 여름. 스트레이는 시카고의 여름을 사랑한다. 아주 덥고 습한 날도 있지만 대부분은 지나치게 덥지 않고 기분 좋은 바람이 분다. 또 거의 매일 맑다. 시카고의 결혼식은 대부분 여름에 야외에서 열릴 정도라고 한다. 다른 계절은 여름만큼 좋지는 않다. 봄과 가을은 날씨가 심하게 변덕스럽고, 겨울은 꽤 추운데다 눈이 많이 내리고 칼바람이 분다. 그래도 스트레이는 여름을 누릴 수 있다면 그 정도의 대가는 치를 만한 모양이다.
미국에는 시카고보다 기후가 좋은 곳이 많다. 스트레이가 시카고로 돌아오기 전 잠시 정착했던 곳이자, 시카고를 제외하고 가장 오랜 시간 생활했던 곳인 오클랜드의 장점 중 하나도 날씨였다. 그래도 아마 스트레이에게 시카고의 여름은 단순히 날씨가 좋은 시기보다 훨씬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향수는 논리로 설명할 수 없다.
어느 때보다 강력한 동기와 계기가 갖춰졌어도 노숙을 벗어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친구 두 명의 집을 오가며 지낼 수 있다는 사실은 매우 큰 도움이 되었지만, 그것을 제외하고는 말 그대로 맨몸뚱이밖에 없었다. 부모에게서는 물질적인 도움은커녕 정신적인 위안도 기대할 수 없었다. 가장 지독하고 끈질긴 중독 중 하나인 헤로인 중독도 견뎌야 했다. 떠돌이 생활을 하는 동안은 한 지역에 일주일 넘게 머문 적이 드물었기 때문에 정착 자체도 낯설었다.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다.
스트레이는 친구들의 집에서 지내면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가장 처음 구한 일은 피자 가게의 접시닦이였다. 보수를 현금으로 주고 신상도 묻지 않는 곳이었다. 대신 시급이 최저임금보다 낮았는데, 스트레이는 그나마 미국 시민이어서 많이 받은 것이었다. 불법체류자인 다른 직원들은 스트레이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 돈을 받고 일을 더 많이 했다.
고등학교를 중퇴한 후 배운 지붕 공사 일도 다시 했다. 지붕 공사를 할 때 무엇이 가장 힘들었는지 묻자 스트레이는 더위였다고 대답했다. 그 일을 할 때는 항상 여름이었던 모양이다. 티셔츠 프린트 가게에서도 일하게 되었다.
스트레이는 그렇게 닥치는 대로 돈을 벌어서 노트북 컴퓨터를 사고 프로그래밍 독학을 다시 시작했다. 방 한 칸 없는 처지에 막일과 공부를 동시에 하는 생활은 너무나도 힘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공부가 어렵지 않고 재미있었다는 것이다. 뭔가 배우는 데에는 항상 자신이 있었다. 노숙하는 동안 한참 뒤처졌던 프로그래밍도 금세 배워서 따라잡을 수 있었다.
2013년 4월부터 스트레이는 프리랜서 프로그래머로 일하기 시작했다. PHP, 자바스크립트, SQL 서버, 루비 등을 사용하는 풀스택 웹 개발자였다. 번듯한 경력이 없는 상태에서 일감을 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다행히 불가능하지도 않았다.
신분증과 사회보장카드가 모두 말소되어서 아주 불편했다. 신분증을 새로 발급받으려면 사회보장카드가 있어야 하고, 사회보장카드를 새로 발급받으려면 신분증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8월에 마침내 신분증을 발급받았다. 서류를 제출했을 때는 아직 거주지가 일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친구의 주소를 사용했다.
10월에 스트레이는 한 음반사의 웹 개발자로 취직했다. 한국이었다면 대학교에서 3학기를 다닌 후 중퇴한 학력과 반년의 프리랜서 경력을 가지고 정직원 프로그래머가 되기는 아마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프로그래머에 대한 수요가 많아서 일자리를 구하기 쉽다고 한다. 대학교 졸업장도 한국보다는 덜 중요하다.
슬럼가 출신의 노숙인이 안정된 사무직 일자리를 얻어 새 인생을 살게 되었다. 아메리칸 드림이 실현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거기다 프로그래머는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직업 중 하나다. 대우도 좋고 직무 만족도도 높다. 프로그래머가 되고 싶어서 대학교에 들어갔을 때는 노숙을 하게 되었고, 노숙 생활의 역경을 벗어나려는 마음이 프로그래머로 자리를 잡는 강력한 동기가 된 것은 큰 아이러니다.
스트레이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난하지 않은 상태가 되었다. 믿을 수 없었고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고 한다. 수중에 충분한 돈이 있다는 사실이 스트레이에게는 낯설었다. 다음 달 집세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필요하거나 가지고 싶은 물건이 있으면 당장 살 수 있었다. 스트레이는 자신이 그런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좋아하는 일을 생업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도 만족스러웠다. 프로그래머가 되기 전에 했던 일들은 아코디언 연주를 제외하고는 전부 육체노동이었다. 돈이 필요해서 일했을 뿐 즐겨본 적은 없었다.
그렇게 약 4년 만에 스트레이는 스트레이stray이기를 멈추고 고향에 다시 정착했다. 4년 동안 많은 것을 얻고 또 많은 것을 잃었다. 수많은 좋은 경험과 그보다도 더 많은 나쁜 경험을 얻고, 미국 전역의 친구들을 얻고, 여러 개의 부러졌다 붙은 뼈를 얻고, 몇 번의 체포 기록과 수배 영장 하나를 얻었다. 시카고 억양을 잃고, 이 몇 개를 잃고, 정치적인 이념을 꽤 많이 잃었다. 우울증과 불안장애 자체는 좋아지지도 나빠지지도 않았지만 우울하거나 불안한 기억은 너무나도 많이 얻었다. 그래도 완전히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예전에 '스트레이, 미국의 빛과 그림자'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던 글을 수정 보완해서 다시 연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