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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미 Jul 06. 2023

주머니칼 - 下

스트레이, 익명의 미국인 이야기 - 34

또 한 가지 아이러니는 주머니칼을 실제로 사용했을 때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는 것이다.


캘리포니아에 있을 때 다른 노숙인이 스트레이의 짐을 훔쳐갔다. 스트레이는 그 남자를 찾아냈고, 주먹다짐 끝에 짐을 되찾아 왔다. 남자는 여자친구가 보는 앞에서 자신을 때려눕혔다는 이유로 스트레이에게 앙심을 품었다.


얼마 후 남자는 갑자기 각목을 들고 스트레이의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 각목으로 스트레이의 얼굴을 후려쳤다. 이 여러 개가 날아갔고 턱과 입도 크게 다쳤다. 스트레이는 계속 각목을 휘두르는 남자에게서 스스로를 방어하다가 주머니칼을 꺼내 남자를 찔렀다.


그날 후로 남자의 소식은 듣지 못했지만, 최소한 스트레이가 마지막으로 본 순간까지는 생명에 지장은 없어 보였다. 스트레이는 도망치지 않았고 응급실이나 약국에 가지도 않았다. 그저 몇 시간 동안 피를 뱉어내면서 계속 그 부근에 머물렀다. 그러다가 체포되었다. 스트레이는 구속된 후 재판에 넘겨졌고 정당방위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미국에서는 정당방위가 한국보다 훨씬 폭넓게 인정된다.


구치소에서 재판을 받는 동안 치료는 전혀 받지 못했다. 스트레이는 상처가 아물 때까지 모든 음식을 작게 잘라서 먹었다. 스트레이에게 어금니 몇 개가 없는 것은 이 사건 때문이다. 턱관절은 맨눈으로 볼 때는 크게 표시가 나지 않지만 엑스레이를 찍어 보면 꽤 비뚤어져 있다고 한다. 제대로 치료하기 위해서는 턱관절을 자른 후 다시 맞추는 큰 수술과 임플란트가 필요하다. 비용도 많이 들고, 수술의 경우에는 전신마취 때문에 위험도 따른다.


스트레이에게 이런 큰 부상을 남긴 그 남자는 어떻게 됐는지 나는 가끔 궁금하다. 스트레이의 정당방위가 인정되었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사건의 책임이 그 남자에게 있다는 뜻이다. 스트레이와 마찬가지로 노숙을 하는 처지였으니 손해배상을 할 능력은 전혀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최소한 스트레이처럼 구속되기는 했을까?


무죄로 끝났고 이제는 체포 기록마저도 지워졌다. 정착한 지 오래된 지금도 스트레이는 그 주머니칼을 여전히 가지고 다닌다. 그러나 이제는 호신용 스프레이도 함께 가지고 다닌다. 어지간히 큰 위험에 처했다고 해도 칼은 꺼내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는 사실을 몸으로 직접 배웠기 때문이다. 미국의 법과 문화에서는 충분히 정당방위로 인정되는 상황이었지만, 재판을 통해 실제로 그 인정을 받아내기까지는 구치소 신세를 져야만 했다.


스트레이는 이 사건 전체에 대해서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말할 때도 있는 한편, 스스로가 마치 죄인인 것처럼 말할 때도 있다.


- 무죄 판결도 받았다며? 애초에 각목으로 얼굴을 때리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

- 내가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면 처음부터 그런 일이 없었겠지.


사건에 대한 나와 스트레이의 대화는 여러 번 이렇게 흘러갔다. 사건에 대한 스트레이의 양면적인 감정은 예전 삶 전체에 대한 감정과도 비슷한 듯하다. 힘든 시간을 오로지 스스로의 힘으로 헤쳐 나가고 다양한 경험을 쌓은 것에 대한 자부심도 있지만, 그 이면에는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었던 삶에 대한 부끄러움과 자기혐오도 커 보인다. 자신이 원해서 선택한 삶이 아님에도 그렇다.


- 네가 지금 이 자리에 이렇게 살아 있어서 다행이야.


내가 스트레이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결국 그것뿐이다. 주머니칼이 없었다면 스트레이는 지금 이 자리에 있지 못할 수도 있고, 살아 있지 못할 수도 있다. 각목에 훨씬 큰 부상을 당했거나, 이를 악물고 노숙에서 벗어날 동기를 찾지 못했을 것이다. 비록 큰 대가가 따랐지만 주머니칼은 스트레이를 두 번 구한 것이다.


(*예전에 '스트레이, 미국의 빛과 그림자'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던 글을 수정 보완해서 다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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