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정미 Jun 29. 2023

주머니칼 - 上

스트레이, 익명의 미국인 이야기 - 33

2009년 말 플로리다에 간 것은 큰 실수였다고 스트레이는 말한다. 그 때 일어난 사건은 지금까지도 스트레이의 발목을 잡고 있다. 그러나 플로리다에 가는 ‘큰 실수’가 없었다면 스트레이는 지금과 같은 삶을 시작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것은 곧 스트레이의 많은 노숙인 친구들처럼 길에서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결코 행운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운이라고만 할 수도 없다는 점에서 참 이상한 일이다.


플로리다는 애초에 가고 싶었던 곳도 아니었다. 생일을 끼고 시카고에 돌아와 있던 스트레이는 원래 겨울이 시작되기 전에 뉴올리언스로 떠날 계획이었다. 그러나 뉴올리언스까지 자신을 태워줄 사람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따뜻한 남쪽으로 데려가 줄 사람이 나타나면 어디든 따라가기로 계획을 바꿨다. 그때 헤로인 중독에서 회복 중이던 한 여자를 만나, 수동 운전을 배워서 함께 플로리다에 간 것이었다.


스트레이는 자신을 태워다 준 여자와 친구가 되어 플로리다에 온 후로도 함께 어울렸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고 말았다. 스트레이는 플로리다에서 만난 다른 젊은 노숙인들과 함께 어느 빈집에 머물고 있었다. 그런데 이 새로운 친구의 잘못으로 경찰들이 그 빈집에 들이닥쳤다. 스트레이와 친구는 체포되었다. 강아지 리비와 헤어진 것이 이 때였다.


체포 후 몸수색에서 나온 주머니칼이 스트레이를 곤경에 빠뜨리고 말았다. 접으면 한 손 안에 다 들어가는 작은 다용도 칼이었다. 항상 가지고 다녔지만 다른 주에서는 한 번도 문제가 된 적이 없었다. 그러나 플로리다에서 스트레이는 주머니에서 꺼낸 적도 없는 주머니칼 때문에 강도 혐의를 받게 되었다.


이 일을 돌이킬 때마다 불안장애가 심해지기 때문에 스트레이는 자세히 이야기하기를 꺼린다. 그래도 여러 번에 걸쳐 스트레이와 이야기하면서 몇 가지는 확실히 알게 되었다. 강도 혐의로 계속 재판을 받았다면 스트레이는 징역 5년을 선고받았을 수 있었다(최소한 경찰들은 그렇게 위협했다). 그러나 국선변호사가 혐의를 무단침입으로 낮춰 줬다. 스트레이는 구치소에서 14일을 보낸 후 경범죄 보호관찰misdemeanor probation 1년을 선고받고 석방되었다. 구속되지 않은 상태로, 그러나 정해진 지역을 벗어나지 않고, 1년간 더 이상의 위법 행위 없이 얌전히 지내면 되는 것이었다.


문제는 스트레이가 플로리다에서 1년이라는 긴 시간은 고사하고 당장 머물 곳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특히 스트레이가 있던 지역은 집도 없고 연고도 없는 사람이 지내기 쉽지 않은 지역이었다고 한다. 밤이 되면 경찰이 특별한 이유 없이 노숙인들을 체포했기 때문이다. 관광객은 길에서 술에 취해 드러누워 있어도 그대로 두지만, 노숙인은 길가에 앉아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구속하는 식이다.


플로리다와 캘리포니아는 겨울에도 날씨가 따뜻하기 때문에 미국 전국의 노숙인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캘리포니아 사람들이라고 해서 노숙인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플로리다 사람들은 그보다도 훨씬 더 노숙인에게 적대적이라고 한다. 일반인과 경찰 모두가 그렇다. 플로리다가 캘리포니아보다 소득 수준이 낮고 생활 여건이 나쁘기 때문인지 모른다. 자신의 삶에 여유가 없으면 남에게 베풀 여유도 없기 마련이다. 플로리다가 더 보수적인 지역인 것도 또 다른 이유일 수 있다. 빈곤과 실업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이다.


나에게 그 당시의 이야기를 할 때, 스트레이는 곧 플로리다를 떠났고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다고만 말했다. 그런데 페이스북을 보면 그 뒤의 이야기가 조금 더 있다. 스트레이는 고향인 시카고에서 다시 대학교를 다니며 보호관찰 기간을 보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던 듯하다. 그러나 여기서 다른 문제가 생겼다. 플로리다와 멀리 떨어진 시카고에서 보호관찰을 이행하는 데에는 몇 천 달러의 비용이 들고, 그 비용을 모두 스트레이가 혼자 힘으로 부담해야 했다는 것이다.


돈도, 집도, 일자리도, 가족이나 친척 중에 도움을 줄 사람도 없는 상태에서, 갑자기 생활비를 벌며 학교를 다녀야 하는데다 추가로 목돈까지 지출되는 데에 스트레이는 커다란 부담을 느꼈던 듯하다. 약물중독 문제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스트레이는 고생스럽지만 자유로운 떠돌이 생활에도 큰 그리움을 느꼈다.


결국 스트레이는 정착해서 보호관찰을 이행하기를 포기했다. 그리고 2010년 2월, 그 전해부터 가고 싶어 했던 뉴올리언스로 떠났다. 보호관찰을 위반한 사실이 알려지자마자 플로리다 주에서는 스트레이의 구속영장이 발부되었다. 일종의 수배자가 된 것이다. 스트레이는 그 후로 플로리다 부근에 가는 일을 피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체포를 계기로 플로리다를 아주 싫어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다지 가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연방제인 미국에서는 지금 자신이 살고 있지 않은 주에 자신의 구속영장이 있을 경우 상황이 복잡해질 수 있다. 물론 중범죄를 저질렀다면 복잡할 것이 없다. 다른 주로 도망친다고 해도 곧 붙잡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찰이 굳이 인력을 투입해서 뒤쫓을 정도의 큰 범죄가 아니라면, 무언가 다른 계기로 경찰에 검문을 당하기 전까지는 잡혀 들어갈 일이 없다. 다만 고용주나 집주인이 뒷조사를 해 보고 영장을 발견하면 채용이나 세놓기를 거부할 가능성은 있다.


어떤 이유로든 경찰에 검문을 당하게 되면 경찰이 데이터베이스에 이름을 조회해 보게 된다. 스트레이는 어떤 때에는 가게에서 물건을 훔치거나 화물열차에 타다가 붙잡혀서, 어떤 때에는 그저 노숙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름을 조회 당했다. 그러면 플로리다 주의 구속영장이 나왔고, 스트레이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구치소에 들어갔다. 실제로는 항상 며칠 만에 풀려났지만, 원칙적으로는 최대 90일까지 구속될 수 있다.


스트레이가 구치소에 있는 동안, 플로리다 주는 스트레이가 붙잡혔다는 연락을 받는다. 그리고 비용을 부담해 스트레이를 데려올 것인지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범죄자 인도에는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플로리다 주는 잡범에 불과한 스트레이를 데려가기를 항상 거부했다.


이 사건 때문에 스트레이는 여러 번 구치소에 갔다. 결말은 항상 똑같았다. 플로리다 주는 매번 인도를 거부했고, 스트레이는 곧 석방되어서 매번 거리로 돌아갔다. 플로리다 주가 인도를 거부했다는 사실이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되고 나면 몇 달간은 괜찮다. 구속해 봤자 의미가 없기 때문에 잡아가지 않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 몇 달이 지난 후에는, 검문을 당하게 되면 다시 그 자리에서 구치소에 간다.


거리에서 지내는 일이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아무리 항상 금세 석방된다고 해도, 구치소는 머물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언제 어디서 갑자기 검문을 당해서 잡혀갈지 모른다는 것도 큰 스트레스였다. 노숙인들에게는 흔히 일어나는 일이라고 한다. 원래는 뚜렷한 근거 없이 검문을 해서는 안 되지만, 경찰들은 지금 찾고 있는 범죄자와 생김새가 닮았다는 구실을 대면서 아무 노숙인이나 검문한다.


여기서 스트레이의 인생을 바꿔 놓은 아이러니가 생겨난다. 몇 년 후 스트레이는 노숙을 그만둘 뿐 아니라 좋은 직업을 얻어 정착하게 되는데, 구속영장이 그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이다. 더 이상 구치소를 들락거리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유일한 동기는 아니었지만 가장 큰 동기였다. 스트레이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총동원해서 노숙 생활을 벗어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힘들게 노력한 끝에 성공했다. 정착한 이후로 스트레이는 단 한 번도 체포나 검문을 당한 적이 없다.


완전히 다른 삶을 거친 지금도 영장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리고 때때로 그 존재만으로 스트레이의 불안장애를 악화시킨다.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은 플로리다에 직접 가서 자수하는 것이지만 큰 위험이 따른다. 우선 자수하는 순간 당장 구속되고, 이미 도망친 전력이 있으므로 보석으로 나올 수 없다. 지금 자신이 자리를 잡은 시카고에 삶을 내버려두고 온 채 플로리다에 갇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재판까지 얼마나 걸릴지, 판결이 어떻게 나올지도 예측하기 쉽지 않다. 플로리다는 미국에서 형법이 엄격하기로 유명한 지역 중 하나다.


정착하고 몇 년이 지난 후, 스트레이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변호사를 고용하고 법적인 절차를 밟은 적이 있다. 스트레이는 서면으로 자신의 현재 거주지를 알리고, 변호사가 자신 대신 플로리다 법정에 출석해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재판은 언제까지고 시작되지 않았다.


불행히도 그 후로 우울증과 불안장애가 악화하면서 스트레이는 현실을 실제보다 나쁘게 인식하게 되었고, 특히 이 일은 큰 스트레스의 원천이 되었다. 스트레이는 언제 경찰이 자신을 잡으러 올지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어 하루하루를 초조하게 보내기 시작했다. 다시 재판을 받게 되면 처음의 강도 혐의가 적용되어 징역 5년을 받게 될 것이라고도 믿게 되었다.


이 일에 대해서 나도 따로 알아보았고, 미국 변호사에게 물어볼 기회도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스트레이의 생각은 잘못되었다. 경찰은 스트레이 같은 잡범의 집에 굳이 쳐들어올 만큼 한가하지 않다. 처음에 강도 혐의가 제기되었다고 해도 결국은 무단침입 혐의로 재판을 했으니, 보호관찰을 어겼다고 해서 강도 혐의로 되돌아간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판사가 스트레이를 괘씸하게 생각해서 스트레이가 제 발로 플로리다의 구치소에 들어갈 때까지 재판을 열지 않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최악의 경우 그렇게 해서 구속영장이 영원히 남는다 해도, 시카고에서 얌전히 살면 잡혀 들어갈 일은 없다.


내가 여러 번 설명해 봤지만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스트레이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불안해하고 날카로워질 뿐이었다. 이 글을 마지막으로 손보고 있는 지금은 예전만큼 날카롭게 반응하지는 않지만 생활고와 우울증 때문에 그 문제를 돌아볼 여유가 없다.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다.


(*예전에 '스트레이, 미국의 빛과 그림자'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던 글을 수정 보완해서 다시 연재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노숙 중의 멕시코 여행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