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입학도 아직 안 했는데- 엄선된 세계 문학 책 10권, 고1 수학 몇 단원 이상, 영어 문법 레벨까지 반 배치 고사의 시험 범위는 충격적이었다..
명문고라는 이름답게 많은 아이들이 선행 학습으로 치고 나갔다.
엎치락 뒤치락, 입시 전쟁의 시작이었다.
정신이 혼미해졌다.
충격을 되새김할 시간도 없이 바로 공부로 달려들었다.
더 치열한 학교 생활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략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그저 내 앞에 놓인 거대한 공부의 산을 사정없이 머릿속으로 욱여넣기에도 바빴다.
해도 뜨지 않은 어두컴컴한 아침에 비몽사몽 일어나 급히 아침을 먹었다. (아침을 먹어야 머리가 든든해져서 공부를 잘한다고 그랬다. 아침밥 먹다가 숟가락을 들고 조는 날도 많았다.) 영어 듣기 평가를 들으며 부지런히 학교로 걸어갔고, 연필로 무릎을 찔러 잠을 깨며 0교시를 시작했다.
쉬는 시간마다 틈틈이 영어 단어를 외웠으며, 7교시.. 8교시.. 야자 시간 밤 10시까지.. 남들보다 조금 더 공부하겠다고 12시까지 독하게 독하게 앉아있었다. 집에 돌아오면 바로 자지 못했다. 또다시 책상에 앉아서 졸면서도 공부를 이어나갔다. 삼당사락 (3시간 자면 붙고, 4시간 자면 떨어진다.) 지금 생각하면 숨이 턱턱 막히는 시간표지만 그때는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절박했다.
토요일에는 영어와 수학 과외를 했다. 일요일마다 다니는 학원에서는 친구들과 머리를 싸매며 하루종일 수학 올림피아드 문제를 풀었다.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지만, 새로운 암기와 이해는 끝이 없었다. 방학 때면 부족하다고 생각한 과목을 집중적으로 펼쳐보았다.
혼자서 독서실을 다니면 꼭 어두컴컴한 작은 공간에서 만화책, 딴생각 등 일탈을 하게 되는 인간의 본능 때문에 판옵티콘처럼 누군가라도 나를 지켜볼 수 있는 넓고 환한 학교 도서관에 붙박이처럼 붙어있곤 했다.
국어라고 하면 고전 시가에서 현대 시까지 나올만한 시만 모은 두꺼운 벽돌책을 잡고 몇 시간씩 파고들었다. 수학은 재밌었다. 딱 맞아 들어가는 답이 나왔을 때의 희열이 좋았고, 잘하면 왠지 모르게 친구들로부터 은근히 받는 선망이 좋았다. 영어는 매번 92점에서 오락가락했기에 1등급을 받아야 하는 내게 항상 두려움이었다.
역사는 이야기가 있어 좋아했고, 윤리는 철학이 있어 재미있었다. (나는 물리보다 역사가 재밌다는 단순한 이유로 문과에 갔다. 이과에서 약대를 갔으면 어땠을까 상상을 해본다.)
점심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호로록 뱃속에 집어넣기 바빴다. 친구가 천천히 먹으면 안절부절못하며 시간을 아까워했고, 매점 가는 것은 가끔의 일탈, 사치였다. 내 유일한 여유는 점심 먹은 후 한 바퀴 도는 운동장 걷기. 그렇게 벚꽃이 피고 지고 파란 잎이 돋아나고 낙엽이 질 때까지 그런 생활은 3년간 이어졌다.
공부를 왜 해야 할까를 고민하지 않았다. 그럴 시간도 없었다. 내 앞에 놓인 공부는 당연한 것이었고 달려 나가야만 했다. 모두가 절박했고, 나 자신과 싸우는 전쟁이었다. 내 옆의 친구는 함께 나아가는 동료이자 경쟁자였다. 이 미묘한 사이를 적당한 거리로 잘 이어나가야 했다. 필기 공책을 빌려줄까 고민하고, 나만 아는 문제를 가르쳐줄까 고민하지만 그럼에도 해주고 옳은 선택이었을까를 고민하는 그런 시간들. 친구의 한 문제는 내 등수의 하락이었다.
잠을 쫓고, 암기에 눌리고, 그럼에도 매일매일 성장하던 나는 어느덧 고3의 7월 모의고사에서 언수외 전체 1등을 하게 된다. 입학 때 세 자릿수에서 1등급까지 기나긴 세월이었다. 내신도 2등급 대로 꽤 준수하게 지켜나갔다. (어찌나 치열했는지 내신이 올 1등급인 친구는 없었다. 비평준화 고등학교 내신의 한계였다.)
그렇게 3개월만 더 버티면 되련만, 과한 불안감과 두려움으로 나는 수능에서 원하는 점수까지 도달하진 못하였다. '난 이 이상으로 잘할 자신이 없어...' 엉엉 울며 수능 재수는 꿈도 꾸지 못했다.
아직 끝이 아니다. 논술이 남아 있었고 어려운 논술책들의 요약본을 읽으며 하루 1만 자씩 글을 썼다. 오른손 세 번째 손가락의 연필 잡는 곳이 움푹 파이고 굳은살이 배겼다.
XX대학교 몇 명, YY대학교 몇 명.. 학교의 자랑스러운 플랜카드에 이름을 올렸다. 준수한 내신과 괜찮은 대학 입학으로 600여 명 입학 중 30명 정도 받는 여러 졸업상 중 하나를 받았으니, 이만하면 고등학교 생활도 잘 마무리한 편이다. 정말 다시 돌아가도 못할 짓이다.
내신+수능+논술까지 입시의 모든 길을 다 걸었다. 괜찮다고 생각한 여러 학교를 지원했고, 다행히 한 명문대에 무사히 입학함으로써 대한민국 입시가 끝이 났다.
10대의 나는... 우리는... 공부 기계였다.
10대를 이렇게 보냈던 게 옳은 선택인지는 모르겠다. 그 당시 입시 위주의 교육 내에서 내겐 선택권이 없었으니까. 다만 이런 생활의 맹점은 '감정'과 '사회생활'을 키우기엔 좋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내가 느끼는 다양한 감정은 공부에 불필요하였기에 뒤로 치우거나 무심하게 넘기기 바빴고, 친구들과의 관계도 공부에 도움이 안 되었기에 미뤄두었다. 관심을 쓸 시간조차 부족했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또한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도 나 자신에게 채찍을 휘두를 뿐, 칭찬을 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안주하게 될까 봐, 시험이라는 고지에서 떨어질까 봐 부족한 점수를 바라보며 나 자신을 혹독하게 다루었다. 그렇게 나이만 든 성인이 되었고- 나 자신을 사랑하고 타인을 인정하고 칭찬하는 법 등을 알게 된 것은 시간이 한참 지난 후의 일이다.
'사람을 존중하는 법', '타인과 존중하며 잘 지내는 법', '나 자신을 사랑하는 법', '대화를 감정이 상하지 않게 더 잘 조율하는 법'과 같은 살아가는데 정말로 필요한 지혜들은 학교 생활에서 배우기 어려웠다. 사회에서 부딪히면서 배우기엔 좀 많이 아쉽다. 지식만큼 중요한 것이 지혜이거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