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thinking cloud Oct 23. 2021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이었다. 출근-일-퇴근-저녁식사-샤워-스마트폰-취침의 잔잔한 하루(적고 나니 따분하지만).
문제는 샤워 후에 터졌다. 씻고 나왔는데 소방차 소리가 들렸다. 너무 가까이 들렸기 때문에 무슨 일이지? 창문을 열어볼까 싶었지만 금방 씻고 나왔으니 옷 챙겨 입고 화장품 바르고 머리 말리는 일이 더 급했다. 사이렌 보다 머리카락에서 떨어지는 물이 더 신경 쓰였다.
그때 내 방문을 누가 쾅쾅 두드렸다. 그제야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고 직감을 했다. 설마, 우리 빌라? 여기? 발렌타인? 정말? 하고 많은 빌라 중에 왜?
대충 점퍼를 걸치고 문을 열었는데, 완전 장비를 갖춘 소방관 한 명이 뭔가 크게 얘기하고 있었다. 내용은 귀에 들어오지 않고 건물 밖으로 나가라는 동작만 눈에 보였다. 그렇게 가까이에서 싸이렌이 울리는데 무슨 똥배짱으로 창문한 번 안 열어 봤대? 처음 겪는 일이었다고는 하지만 완전히 심각한 안전 불감증이었다.
머리카락에 물이 뚝뚝 떨어지는 그대로 밖에 나오는 동안도 그 소방관은 다른 옆방 문을 두드리며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했다. 이 원룸에 방이 15개는 되는데 그걸 다 확인하고 나가려는 걸까. 소방관은 나보다도 한참 어려 보였다. 위험하니까 대충 두드리고 나오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지침인듯했다. 그 소방관 분께 내 방문을 두드려주어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밖에서는 그 골목 주민들이 거의 다 나와서 구경을 하고 있었다. 소방차는 골목을 꽉 메우고 있었다. 파자마 위에 두꺼운 점퍼를 걸치고 삼선 슬리퍼를 신고 있는 내 행색이 '모습'보다 '꼬락서니'에 가깝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괜히 소방차 뒤쪽 사람이 없는 곳에 숨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들어보니 화재가 아니었다. 나와 같은 층의 두 방 건너에서 요리를 하는데 실패해서 연기가 새어나간 걸 보고 이상하게 여긴 동네 주민이 신고한 것이었다. 아니 무슨 요리를 어떻게 실패하면 그렇게 되는지 내가 봐도 심상치 않은 검은 연기가 나오고 있었고 이상한 냄새가 났다.
만약에 정말 화재였을 경우, 내가 씻고 나오는 게 늦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니 오싹했다. 정말이지 씻는 동안은 싸이렌 소리도 아득하게 들렸으니까.
요란하게 왔던 소방차는 조용히 돌아갔다. 웅성거리던 사람들도 제각각 흩어졌다. 나는 복도에 퍼진 냄새를 맡으며 유쾌하지 않은 기분으로 다시 내 방으로 돌아왔다. 결국 별 일 아닌 소동으로 마무리되었으나 놀란 가슴을 진정시킬 필요는 있었다.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를 맞딱뜨렸을 때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싶어 진다는 걸 알았다. 얘기하지 말자고 누르고 있으니 그 마음이 더 강해졌다. 전화를 걸만한 사람을 찾아보았다. 본가는 가장 먼저 제외했다. 괜한 걱정을 끼친다는 생각이었다.
몇 안 되는 친구 중에 나와 비슷하게 혼자 원룸생활을 하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러저러해서 잠시 피난민 되었다고 과장을 조금 섞어가며 얘기했다. 친구는 괜찮아? 그래, 별일 아니었으니 다행이다. 들어가서 푹 쉬어.라고 내가 그런 전화를 받았다면 했을 말을 했다. 말의 내용보다 불안한 상황에 듣는 친구의 목소리가 얼마나 반가웠는지만 기억에 남는다.
나는 평소에 이런 위기 상황이 오면 적어도 가족사진이 든 앨범은 챙기겠지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근데 웬걸 가족사진은 무슨. 그 상황이 오니까 안중에도 없었다. 따뜻한 옷과 생수 한 병, 지갑과 차키가 들어있는 가방. 생존과 도망에 직결되는 것에 온 정신이 쏠리는 현상을 경험했다.
나 혼자만의 성이 안전하리라 믿어도 좋다. 언제든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만 잊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