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눈 비 그리고 바람 Oct 7. 2023
“oink, oink”
딸아이에게 외국 동화를 들려줬다. 동물 울음소리를 흉내 내는 장면이 연속으로 나왔다. 양은 "Baa Baa" 운다고 하고 돼지는 "oink, oink" 운다고 했다. 나는 아이에게 들려주면서도 불안해했다. 분명 왜 이렇게 우는지 이유를 물을게 뻔했으니까. 나는 딸아이의 눈치를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딸아이는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이윽고 나와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역시나였다.
“아빠 왜 돼지는 오잉크 오잉크 울어요? 꿀꿀하고 울지 않아요?”
“,,,,,”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언어에 대한 특징을 들어가며 설명하기에 아이는 너무 어렸다. 모른다 할 수가 없어서 결국 미국돼지는 그렇게 운다 했다. 딸아이는 의아해하면서도 신기해했다. 다음에 미국 가면 돼지가 보고 싶다고 하길래 그러자고 했다. 위기를 잘 모면했다며 좋아하했지만 찝찝했다. 조금 더 크면 다시 설명해 줘야겠다고 다짐했다.
의성어란 소리를 흉내 내는 단어다. 나 어렸을 때만 해도 국어를 배우기 전에는 이런 쉬운 단어들부터 접했다. 참새 짹짹, 돼지 꿀꿀, 병아리 삐약삐약 이라고 조기교육을 받았다. 제식훈련 받는 군인처럼 발맞춰 이동할 때마다 선창과 후창을 반복했다. 하도 많이 들어서 자다가도 잠꼬대할 정도. 그때부터 돼지는 꿀꿀하고 울었고, 병아리는 삐약삐약 하고 울었다.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도 변함없기는 마찬가지. 미국 돼지라고 다를 게 없다. 각 나라 대표들이 모여 자신의 언어로 동물들이 이렇게 운다고 해 봤자 서로가 서로를 의아하게 볼 것이 당연했다.
단어가 모든 사유의 틀을 정의하는 듯하다. 구사할 수 있는 단어가 다채로울수록 시시각각 변화하는 상황에 대해서 그에 맞는 인지능력도 변한다. 그만큼 생각하고 느끼고 감응하는 범위도 다를 것이다. 색깔만 봐도 그렇다. 노랗다는 색의 표현법이 한국어에는 무수히 많이 존재한다. 노랗다, 누렇다, 샛노랗다, 노르스름하다, 노리끼리하다, 누르죽죽하다, 노르댕댕하다, 누르끄레하다, 노르칙칙하다 등. 수도 없이 파생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런 단어들로 인해 색깔에 대한 감각의 층위가 그렇지 못한 언어권에 비해 높은 것이다.
에스키모인들의 언어인 이누이트어도 이와 비슷한 예가 있다. 눈(snow)을 가리키는 단어가 수십 개가 있다. 떨어진 눈, 내리는 눈, 단단한 눈, 온통 눈으로 둘러싸여 눈과 같이 생활하는 그들에게는 눈이 다 같은 눈이 아닐 것이다. 아무래도 눈에 대한 인식이 우리보다 넓을 수밖에 없다. 단어 수 만큼이나 그 종류를 구분할 수 있을 정도의 눈썰미가 있다. 아는 만큼 보이듯, 정의할 수 있는 단어만큼이나 그 대상을 감각할 수 있다는 말과 같으니까.
지금 나도 느낀 것이 있으니 글로 쓸 수 있는 거다. 인간의 감정이란 게 슬프다 행복하다 감동이다 웃기다 이런 식의 단어들로만 단정 할 수는 없다. 수많은 감정중에 우선순위나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감정을 포괄할 수 있는 단어로 내어 놓을 뿐이다. 만약 인간들의 복잡 미묘하고, 어렵다 못해 이상하기까지한 감정선을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단어들이 있다면 어떨까? 아마도 쓰기라는 행위가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냥 매 순간마다 거기에 맞는 단어 하나만 쓰면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으니. 나는 단어 하나로 지금의 생각을 표현할 방법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쓴다. 생각을 구체화시키고 가시화시킨 다음 낱낱이 분해한다. 그제야 천천히 소화해 가며 활자 늘여놓기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요즘 카톡이나 SNS 단톡방에 올라오는 단어들을 넋을 놓고 볼 때가 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뜻은 알 것 같은데 구체적이지 않은 모호한 단어들로 넘쳐났다. 부연 설명이 필요하면 이모티콘이 문자 대신 그 자리를 대신했다. 조만간 대부분의 단어가 멸종을 고할 것만 같았다. 좋은 상황에는 헐, 대박, 쩐다 같은 단어가. 좋지 못한 상황에도 헐, 대박, 쩐다 같은 단어가 올라왔다. 거시기 용법 같은 그 단어들은 어떤 상황에도 들어맞았고 어떻게 써도 어울렸다. 이런 단어를 많이 쓰면 쓸수록 구체적인 단어들은 생각 저 편으로 매몰되었다. 나중에 그 구체적인 감정을 느낀다 하더라도 표현하지 못할 수도 있고 아니면 그 감정을 담을 단어가 없어 감각 그 자체를 망각할지도 모르겠다.
이런 애매함을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글쓰기는 단순히 자신의 이야기를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라고만 생각하지 말자. 쓰기의 표면적인 기능은 자기 생각 전달하기가 기본인 것은 맞다. 그렇다고 해서 머리에 떠오르는 기분이나 감정만 나열한다고 다 글이 되지 않는다. 기분이 좋다, 재미있다, 맛있었다, 훌륭하다와 같은 단어로 감정을 퉁치지 말라는 말이다. 좀 더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해야 글쓴이의 욕망과 독자의 욕망이 부딪히고 당겨지며 생각의 접접이란 게 생겨난다. 이런 접접이 넓어지는 구간에서 사유의 경계 또한 확장되는 것 같다. 글이 모여 자신의 생각이 되고 이런 생각들이 모여 새로운 단어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단지 한 단어라 하기에 길이가 길어 조금 지루할 뿐이다.
프리즘을 통해 햇빛을 관찰하면 빨주노초파남보 7가지 색상으로 보인다. 무지개라고 지칭하는 익숙한 감각 사이에서도 무수히 많은 색이 끼어있다. 하지만 우리는 7가지 색상으로만 인식한다. 삶을 감각하고 표현하는 결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아는 만큼 쓸 수 있고, 쓸 수 있는 만큼 삶을 대하는 시야 또한 넓어진다. 글 쓰는 행위가 어찌 보면 그 앎과 표현할 수 있음 사이를 가장 촘촘하게 채워갈 수 있는 수단이 아닐까 싶다.
삶에다 프리즘을 대보고 그 사이에 늘어지는 빛을 억지로라도 감각하려는 행위. 그 억지라고 지칭하는 고통이 나를 있게 하는 원동력이자 나를 나답게 만드는 단어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