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눈 비 그리고 바람
May 26. 2024
이탈리아로 출장을 다녀왔다.
이전에도 해외 출장이 몇 번 있었지만 이번은 달랐다. 순수 설계적인 논의를 위해 다녀왔다. 신규 설계 중인 반도체에 대한 평가와 추후 방향성 논의가 주요 목적. 고객 상대가 아닌 내가 고객의 입장으로써 출장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해외로 나가는 일이지만 부담은 없었다. 해당 반도체 담당자가 같이 동행하기로 했고, 모든 과정을 책임지기로 했었으니까. 그만큼 기대나 설렘도 없기는 마찬가지. 자신의 돈으로 해외여행을 간다면 미리 설레고, 바쁘고, 기대했겠지. 그냥 새로운 환경에서 비슷한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이탈리아 도착 3일째. 몸도 마음도 우울한 날씨만큼 지쳐있다. 새로운 나라에 대한 기대감 보다 당장에 결핍된 것에 대한 불만이 컸다. 이탈리아 음식은 왜 모두 짜고, 시원한 아메리카노는 먹을 수 없는지, 와이파이나 인터넷은 또 이렇게나 느린지 불만이었다. 무엇보다 7시간이라는 시차까지 겹쳐 현실을 제대로 감각하는 능력마저 상실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낯설었다. 충분히 낯설었더니 쓰겠다는 의욕마저 사라졌다. 브런치 연재일이 되면 전날부터 보내는 알림이 없었고, 쓰겠다는 여유마저 수면과 두통에 잠식당한 지 오래였으니까. 머릿속 깊은 내면에는 써야 한다는 의식은 있었지만 일부로 끄집어내지 않았다. 쓸 수 없음에 대한 죄책감만 커질 것이 분명했으니까.
날씨 덕분에 낯선 땅 이탈리아에서 야근을 했다. 생각보다 일정이 빨리 끝났다. 자유시간이 1.5일이나 생겼다. 맑은 날을 위해 비 오는 날 강행하자는 전략이 먹힌 것이다. 우리를 버린 줄로만 알았던 날씨 아니던가. 우리는 렌터카를 빌린 후 소풍 전날 아이처럼 들떠 있었다.
두오모 광장을 비롯해, 스포르체스코 성당,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교회 등 주요 관광지 여러 곳을 둘러봤다. 중간중간 맛집을 들렸으며 틈만 나면 젤라토를 사 먹었다. 그저 행복했다. 이전에는 모든 것이 불편하고 어색했었는데, 지금은 모든 것이 새롭고 또 새롭다. 무엇보다 내가 디스크 환자라는 사실을 잊고 지냈던 사실이다.
나는 디스크 환자다. 30분만 걸어도 허리가 욱신거리고 종아리 방사통이 심해 누워있어야 했다. 해외 출장 전에도 걱정했었지만 흔치 않은 기회라 포기하지 않았다. 스스로 잊고 있었다. 자유시간 첫날에 14km를 걸었고 둘째 날에는 12km를 걸었다. 그렇게 걸었음에도 아프지 않았다. 감각하고 느끼고 싶다는 욕구가 아프다는 감각을 가리고 있었으니까. 다른 이가 말해줘서 알았다. ‘맞다 난 디스크 환자였지’
출장 마지막날. 나는 에스프레소를 즐겨 먹고 짭조름한 음식을 찾아 먹었다. 와이파이나 인터넷이 잘 되지 않아도 괜찮았다. 빨리 하라고 재촉하는 사람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었다. 새로운 환경에 나름의 방식으로 적응하고 있었던 거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쓰기 욕구도 살아났다. 엄청 낯섦이 신기함으로 다가왔고 충분히 쓰기 흥미로움으로 다가오기 시작했으니까.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 안 혼자 스마트폰을 꺼내 장편의 글을 썼다. 해외출장이 해외여행처럼 다가왔다거나, 색다른 환경에서 폭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었음에 대한 식상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단지 낯설고 불편함이 새로움으로 변하는 어느 지점에서 느꼈던 감각을 잊고 싶지 않아서다. 마치 몇 달간 세계여행이라도 하고 돌아온 여행 작가처럼 글을 쓰고 싶었다.
그렇다. 우리가 느끼는 대부분의 불만과 불행은 스스로를 자신의 기대에 가두기 때문이다. 기대에 어긋나면 불편할 것이라 치부하고 마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나면 나쁜 결과에도 덜 아플 것 같았으니까. 디스크 환자는 많이 걷지 못할 것, 직장만 아니면 살만 할 것, 돈만 많으면 걱정이 없을 것과 같은 기대가 끝도 없이 나온다. 기대라는 것은 꼭 좋은 일에만 빗대어 보거나 일상을 탈출하기 위한 도구가 될 수 없다.
지금 삶에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지금 이 순간 만끽하기, 그리고 가진 것 안에서 살아보기. 나이 사십, 해외 출장에서 깨달은 출장보고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