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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 비 그리고 바람 Jul 29. 2024

응답하라 1994

 옛날 노래 듣기가 한창이다.

학창 시절, 공부가 제일 쉽다거나 교과서만 봐도 서울대 갈 수 있다던 이야기가 전설처럼 떠돌던 때가 있었다. 공부가 싫었던 만큼 소소한 일탈이 달콤했던 시절이다. 나는 그때도 노래 듣기를 좋아했다. 유선 이어폰 꽂고 사춘기 같은 선율에 빠져 드는 것만큼 야무진 위안은 없었으니까. 사실 엄마 잔소리 듣고도 모른 척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다.


음원 어플이나 MPS가 없던 시절, 카세트에 유선 이어폰 꽂아 노래를 들었다. 짤랑이는 용돈으로는 정규 앨범 사기도 역부족. 공테이프 사서 라디오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사연 뒤에 노래가 나오면 기다렸다는 듯 녹음 버튼을 눌렀다. 방송시간 맞춘다고 노래가 끊기거나 광고가 녹음되는 경우도 다반사. 어렵게 완곡을 녹음하면 그게 또 그렇게 좋았다.


머리가 지끈거리면 어김없이 이어폰부터 귀에 꽂는다. 플레이 버튼 누르면 최소한 소리만큼은 세상과 어긋날 수 있었으니까. 아무리 크게 들어도 방해하지 않는다는 게 포인트다. 책상 서랍에 녹음된 테이프가 하나둘 쌓여간다. 쌓을수록 공부도 더 잘 되는 것 같다. 주머니 두둑한 사람이 여유가 넘치듯 수제 테이프가 늘어갈수록 머리도 잘 돌아가는 원리 같다.


불현듯 정신이 든다. 기력 없고 온몸이 아프기만 한 것을 보니 현실임을 직감했다. 회사 모니터 앞에서 한 손은 달력을 한 손은 머리채를 쥐고 있다. 뜻대로 잘 안 되는 모양이다. 정확하게는 쳐내는 일보다 들어오는 일이 더 많은 상황이다. 일해도 일이 줄지 않는 것은 모든 직장인의 애환일 테지. 곧 휴가라는 생각으로 다독여 봤지만 역부족이다. 이내 체념에 젖은 깊은 한숨만 내쉰다.


학창 시절 습관이 머리를 스친다. 영어 듣기도 있었기에 야자 시간 주어진 합법적인 일탈. 교과서가 지겹고 외운다는 행위가 싫어질 무렵 선택했던 가장 위대한 딴짓 아니던가. ‘그때도 통했다면 지금도 먹히지 않을까?’ 모니터 아래 무심하게 널브러진 이어폰을 본다. 화상회의 할 때 쓰는 이어폰인데, 꽂아볼까 라는 욕망이 작동하기 전 귀로 가져갔다. 어색한데 익숙하다. 그때와 바뀐 점이 있다면 지금은 무선으로 변했다는 점과 공부대신 일을 한다는 거다.


스마트폰 노래 어플을 열었다. TOP100 요즘 노래는 들어도 잘 모르겠고, 내 취향도 아니었다. 90년대 노래를 선택했다. 그중 익숙한 제목이 보인다. 30년 전 노래인데 검색되는 게 신기했다. 음질은 어떨지 궁금했다. 과거 테이프 녹음할 때 끼여있던 빛바랜 노이즈마저 재현되면 어쩌나 했다. 그중 가장 익숙한 노래를 눌렀다. ‘더더 - 내게 다시’


역시나 친숙한 반주음이다. 기분 좋은 흥열임이 불현듯 튀어나왔다. 급히 주변을 둘러봤다. 이어폰에만 노래가 나오는지 몇 번이고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이다. 한쪽 귀 정도는 딴짓해도 되겠지. 자기 위안에 힘입어 과감한 일탈을 시도한다. 회사에 이어폰 꽂은 채 노래 듣기는 아직도 어색하다. MZ들은 잘도 듣던데, 보수적인 어르신 때문에 아직도 눈치 보는 중이다. 가장이라는 무게는 보든 안보든 잘해야 한다는 도덕성 장착을 전재로 해야 했으니까.


멈출 수 없다. 익숙하고 친근한 드럼 소리가 왜 이리 슬픈 걸까. 학창 시절 느꼈던 온갖 짠내가 한꺼번에 넘실댄다. 야자를 해야 하는 운명이 싫고, 부모님 잔소리에 서럽고, 시험 결과에 울고 웃던 그때의 희비가 지금까지 이어지다니. 순간 감각한 감정과 추억에 적잖게 놀랐던 거 같다. 콧등을 타고 들어온 무언가에 콧물을 훌쩍인다. 답답한 기운을 어떻게 날릴까로 시작했던 도피가 맨 정신으로 앉아 있기 힘들 지경의 환희를 주다니.


그때부터였던 거 같다. 일이 잘 안 풀린다 싶으면 어김없이 이어폰을 꽂았다. 고교시절 노래로 거닐다 초등학교 때까지 갔다. 감정이 격하게 도는 날에는 몇 번이고 청취 중단사태를 벌이기도 했다. 과거 나를 위로했던 선율에 반응한 듯했다. 그때의 포근함을 몸이 기억하고 있는지도.


사소한 노래에 감정 이입하고, 주인공이 되어 보기도 하고, 몰입해서 다시 들어보는 여유가 필요하다. 노래 따라 부르며 위안받고자 함이 아니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 힘들어할지도 모를 나 자신에게 보내는 위로 같다. 어쩌면 노래 듣기란 내 마음 깊숙한 곳에 타임캡슐 묻어두는 행위일지도. 그때가 되면 지금의 고난이 별거 아니었음을 추억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나는 그저 아이가 된다. 그 시절 노래를 즐겨 듣는 순간만큼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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