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눈 비 그리고 바람 Jul 06. 2024

신은 정말 존재하는가?

 정말 신은 존재하는가?

지금껏 살아오며 수십 번 되뇌었던 질문이다. 매번 답은 구할 수 없었지만 혼자 묻고 실망하는 과정에서 뜻밖의 답을 얻기도 했다. 어쩌면 신은 정말 있을지도. 견딜 수 있을 만큼의 고통과 다음에 닥칠 시련을 정면으로 막아설 용기를 여분으로 챙겨주는 걸 보면 말이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살만 했다. 이런 날만 지속된다면 내가 하는 일도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삶의 중력권에 빠져 살았다. 딴짓의 힘을 키워 쳇바퀴 돌던 삶을 벗어날 날만 기다리던 때가 내게도 있었다. 한동안 그 희망의 단초조차 잊고 살았다. 매일같이 돌아오고 지나가는 세월에 잠시간 넋을 놓고 살았던 거다.


얄궂다. 왜 시련과 고난은 엎친데 덮친 격으로 몰려다니는 것일까? 간헐적 단식처럼 살만한 고통 가지고는 내공이 길러질 수 없음 아는 것일까? 아니면 한참의 무탈이 몸에 해롭다고 말해주려는 것일까? 몸과 마음이 다쳐 몸부릴 칠 정도의 고통이 찾아오고 나서야 후회하는 내가 미련하다.


요 며칠 힘든 날을 즐기는 중이다. 한번 빠지니 헤어 나올 수 없다. 즐긴다는 표현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자주 빠지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한 가지 다행스러운 건 아무리 힘들어도 더 망가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항상 오늘이 가장 힘든 날이고, 시간의 치유를 믿었다. 또한 극복하고 나서의 삶을 욕망했다. 무엇보다 이런 글 쓰며 스스로의 구덩이에 바닥이 있음을 인지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


“지금 내가 겪는 고통이 인간의 최댓값이다. 지금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다. 힘내라며 말 던지는 이들은 상상조차 못하면서 무성의하다” 라며 스스로를 몰아갔던 적이 있다. 나는 단지 운이 없는 사람이고 인생 자체가 암담한 사람 즈음으로 생각했다. 누가 무슨 말 하든 들리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스스로를 가둔 채 나갈 수 없다며 비명을 질러던 것 같다. 왜냐하면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었으니까.


‘마음먹기 달렸다, 비 온 뒤 땅이 더 굳는다’ 이런 유익한 격언을 달고 살지 않는다. 때에 따라 달고 살아야 겨우 살만한 경우도 있다. 이런 생각만으로 마음은 충분히 여유롭다. 지금의 두드림이 힘들지언정 싫지는 않다. 다음에 찾아올 그날을 대비할 수 있으니까. 지출의 즐거움 보다 아낌에서 오는 만족이 크면 저축을 한다. 이와 비슷한 원리지 않을까? 나는 그저 다음에 찾아올 만기일을 위해 바지런히 살아간다. 고통을 축적하며 안정을 갈구하는 그날을 위해 달리는 중인 것이다.


감각은 현실이고 자아는 이상에 있다. 세상과 가장 맞닿아 있는 현실은 아프고 슬프고 불안하지만, 자아는 평온할 수 있음을 아는 눈치다. 세월이라는 낚싯대에 감각 하나만 믿고서 혼탁한 물밑 세상을 알리 없다. 그 안에 물고기가 사는지, 고래가 사는지 알 수 없는 것처럼. 바늘에 달린 떡밥을 칼로 썰며 외식을 즐기는 물고기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오늘도 낚싯바늘에 작은 희망을 꿰어 현실로 던진다. 어쩌면 아주 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물고기가 잡힐지도 모를 일이다. 단지 신이 있다면 그는 모두 알고 있겠지만. 그가 답하기 전까지는 그저 하염없이 낚싯대만 바라볼 수밖에.


이전 13화 전동 킥보드가 만든 숲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