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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 비 그리고 바람 Jun 23. 2024

감정을 찍는 카메라

 지난날 사진을 본다.

사진만으로 당시의 감정이나 감흥에 젖어 한참을 머문다. 역시 남는 건 사진뿐이다. 찍길 잘했다 한다. 눈으로 보고 느끼는 것보다 렌즈를 먼저 들이대는 이유다. 내가 못 봐도 렌즈로만 남기면 된다는 생각, 뒤에 가서 다시 보면 된다는 생각이 나를 감정 미약자로 이끌었던 거 같다.


며칠 전 스마트폰에 못 보던 알람이 하나 떴다. ‘5년 전 사진을 감상하세요’ 광고인줄 알고 지우려 했다. 대표 사진을 보고는 흠칫 놀랐다. 딸아이 갓난아기 시절 사진이 콕 박혀있었다. 홀린 듯 눌렀다. 정확하게 5년 전 오늘 날짜에 찍었던 사진이 쏟아졌다. 사진은 찍고서 다시 들춰보지 않으니 AI가 하도 답답해서 그런가 보다 했다.


불현듯 시작된 회고 시간. 사진을 보며 스미는 감정 찾기가 한창이다. 사진 찍을 당시 내가 했던 말 떠올렸던 감정, 행동, 상황을 모조리 끄집어낸다. 중간중간 삭제된 기억 때문에 몇 번이고 고개를 갸웃하기도 했다. 풋풋하면서도 낯선 모습 투성이지만 추억을 복기하는데 문제는 없다. 역시 사진이 최고라며 더 짙은 과거로 돌아간다. 10년 전 사진에 시선이 머문다. 이제는 추억보다 낯섦이 더 크다. 이랬던 적이 있었나 하며 애꿎은 화질만 탓했다. 회상도 기억도 모두 어렴풋할 뿐이다.


사진은 분명 장면을 남긴다. 낡은 책 어딘가 끼여있는 코팅된 은행잎처럼, 언제 다시 열어볼지 모르는 책 안에서 눌린 채 기다릴 뿐이다. 사진은 그저 납작하게 눌린 책갈피일 뿐이다. 본문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대신할 수 없다. 이런 이야기가 있었음을 흔적만 남길뿐이다. 시간이 지나 보니 알 것 같기도 하다. 남는 건 사진이 아니라는 사실 말이다.


하나 둘 잊히는 감정이 아쉽다. 사진만 믿고 내버려 둔 감각의 지나침에 후회가 인다. 그때 좀 더 눈으로 담아둘걸. 벅차오르면서도 가슴 아렸던 감정의 흔적을 어떻게든 더 감각하지 못한 걸 통탄한다. 허투루 살아온 사람은 아니지만, 점차 잃어가는 기억 앞에 게으름뱅이가 된듯한 기분이다. 사진으로는 지나온 삶의 궤적을 남길 수 없다. 지금도 내가 왜 슬프고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사진으로 남길 수 없지 않은가?


세월 앞에 무뎌지는 용량의 한계를 느낀다. 앞으로도 더 자주 느끼겠지. 하지만 걱정하지 않는다. 나는 쓰기라는 감각을 통해 감정의 탁본을 뜰 수 있으니까. 그때의 감정과 꼭 같지는 않더라도, 매번 비슷하지만 다른 느낌으로 치환할 수 있는 USB를 가졌으니까.


지금은 있는 그대로를 감각하려 애쓴다. 사진은 다음이다. 꼭 찍지 않아도 된다. 있는 그대로 발화 중인 감정을 가슴에 담는다. 순간의 감정에 집중하며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삼켜낸다. 시간이 지나면 여운이 남는다. 이제는 그 무엇도 글이 될 수 있다. 말이 되지 않아도 개의치 않는다. 어차피 감정이라는 것은 이유도 없고 과정도 없는 거니까. 그냥 생긴 대로 느낄 뿐이다. 나이 사십에 얻은 감정 카메라 사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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