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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비 그리고 바람
Aug 11. 2024
“이거는 비밀이니깐 꼭 너만 알아라”
직장 동료가 수줍게 자신의 진심을 털어놓는다. 곧 퇴사 후 이직 한다고. 단 비밀로 해달라는 전제조건을 붙였다. 퇴사 한 달 전 자기가 이야기할 거란다. 나는 이야기할 곳도 없다며 당연함을 과시했다. 그와 나는 동갑내기라 그런지 동료보다는 우정이 더 어울리는 사이다.
남들이 모르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매사 과묵하지만 할 말은 해야 적성이 풀리는 나. 대화하거나 술을 마실 때 무심코 뱉는 말을 경계해야 했다. 말하기 전 검열을 한번 더 거쳐야 하는 번거로움을 자처한다. 아는 자의 업보라며 혼자 비장하다. 인류를 구하는 비밀 요원이 따로 없다. 그와의 약속이기도 하고 나 자신과의 약속이기도 했다. 불혹에 나이라면 무거운 입 장착은기본이지.
비밀이 주입되고 며칠 뒤, 점심 식사자리. 한 테이블에 나 포함 4명이 앉았다. 그리고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OO책임 곧 나간 더 다라.”
“아 네 알고 있었어요”
“퇴사 이제 두 달도 남지 않았다던데요.”
3명은 이미 다 아는 눈치다. 나는 망설였다. 어떻게 할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밥 한 숟갈 크게 떠 입에 넣었다. 우걱우걱 씹고 있는데 그런 모습이 태연하게 보였나 보다. 눈치 빠른 동료가 고개를 끄덕인다. 나 또한 알고 있음을 직감하는 듯했다. 혼란스러웠다. 모른척해야 하는데, 미리 작정하지 않으면 거짓말 못하는 투명 얼굴 때문에 다 들통 난 셈이다.
모른 척하자니 거짓말 같고, 관계가 듬성한 사람 같다. 아는 척하자니 그와 했던 약속과 내 양심이 걸렸다. 도덕과 의무, 책무, 정직, 우정과 같은 감정이 한데 엉켜 충돌한다. 스쳐간 감정은 많지만 결국 몇 가지 기분만 남는다. 허탈한데 불편했다. 그날 나는 말을 아꼈다. 고개만 끄덕일 뿐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럴 거면 나한테 말하지 말지’
그날 퇴근길 혼자 생각에 잠긴다. 비밀로 지켜달라던 동료의 의도가 궁금하다. 분명 나만 알고 있으라 했거늘, 나는 무슨 벼슬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우쭐하기까지 했다. 퇴사를 해도 그와 나는 돈독한 사이가 될 거라며 좋아했는데. 혼자 김칫국 마시고 밥까지 말아먹은 심정이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가 원망스러운 것이다.
진실은 알 수 없다. 회사를 나가는 마당에 모든 이에게 비밀이라며 말했을 수도 있고, 친한 몇몇에게만 말해준 과묵한 의리파 일지도 모른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귀 형벌을 참지 못한 그 몇몇이 말하고 다녔을지도. 당사자에게 물어볼 수도 없다. 말해봐야 지금보다 나아지는 건 없을 테니까. 괜히 예민한 사람이라는 낙인만 찍히겠지.
외부 발설이 허락되지 않는 사실이라면 나를 비껴갔으면 한다. 차라리 말하고 싶어 안달 난 이들에게 전해 듣고 호들갑 떠는 편이 속 편할지도. 혼자 침묵을 종용하고도 거짓과 신뢰를 저울질해야 하는 경우는 없을 테니까. 당연한데 당연할 수 없음은 찝찝함만 남긴다. 그를 보는 내 시선도, 내 안에 있는 도덕적 장치를 의심하는 나 자신에게도 말이다.
사실 비밀이라는 것은 누군가에게 알려지지 않는다면 성립할 수 없다. 애초부터 아무도 모른다면 ‘비밀’이라는 단어 자체가 세상 밖으로 드러날 리 없으니까. 누군가 알고, 말하는 이가 있고, 모른 척하는 이가 있기에 ‘비밀’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면 서로 속닥이는 이유에 대해 기분 나쁠 필요가 없는 것 같다. 오히려 비밀이라고 말했음에도 끝까지 침묵을 지키는 이가 설명되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날 저녁. 또 다른 동료들과 술잔을 기울였다. 점심때와 비슷한 화제를 꺼내 든다. OO책임 퇴사하는 거 아냐고 묻는다. 조심스러운 낯빛으로 나지막하게 말하는 거 보니, 분명 비밀이라는 조건이 붙었음을 짐작했다. 속으로 껄껄 웃었다. 이런 말 나올 줄 알고 연습해 왔지. 나는 호들갑 떨며 “진짜?”로 대꾸한다. 말하는 이는 신이 나서 설명 중이다. 자신이 마치 인류를 구한 비밀요원이라도 되는 것 마냥.
비밀을 만든 장본인이든, 비밀을 발설한 중개업자든 잘못한 사람은 없다. 단지 비밀이라는 포장지에 싸인 채 유통되는 알맹이만 있을 뿐. 세상에 비밀은 없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