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2학년 때 내 친구 현정이는 유머러스하고 센스도 있어서 또래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거절당하는 것이 두려워 다가오는 아이들하고만 교우관계를 맺었던 나와는 달랐다. 현정이는 다른 사람에게 부탁도 잘하고 또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의지하는 것도 자연스럽게 받아줬다. 내성적이고 숫기가 없었던 나는 둥글둥글 성격 좋은 현정이를 좋아하고 또 내심 부러워했다.
‘어떻게 저렇게 자연스럽게 친구를 사귈 수 있을까?’
성격 좋은 척 흉내도 내 보았지만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날은 너무 피곤했다. 이유가 몹시도 궁금하던 차에 우연히 현정이네 집에 놀러 갈 기회가 있었다.
‘정아 왔니?’
현정이의 성격은 유전이었다. 그녀의 엄마 역시 친구처럼 다정다감했고 유머러스했다. 살면서 종종 현정이처럼 ‘관계지능’이 높은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때마다 매번 느꼈던 점은 그들의 둥글둥글 모나지 않은 성격이 부모 중 누군가를 닮았다는 점이었다. 물론 나의 많지 않은 경험을 바탕으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내리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우리가 첫울음을 내뱉을 때부터 첫 친구를 사귈 때까지 인간관계 class 101의 선생님은 주 양육자이다. 심리학자들은 만 3세까지 주 양육자와 어떤 형태의 애착 관계를 경험하느냐가 성인이 되어 사람들과 맺는 관계 패턴에 무의식적으로 큰 영향을 끼친다고 한다.
성인 애착 유형은 크게 안전형, 회피형, 불안형, 혼란형으로 나뉜다. 안정형은 내 친구 현정이처럼 별 노력 없이 다른 사람들과 편안하게 관계 맺을 수 있고, 건강한 관계를 유지해 나갈 수 있다. 말하자면 ‘관계 금수저’들이다. 보통 상대방에 대한 신뢰도가 높은 편이며, 서로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자세를 갖고 있다.
두 번째 회피형은 사람들에게 온전히 의존하는 것이 어렵게 느껴진다. 어린 시절 자신의 요구에 대해 거절당한 경험이 많아서 또다시 요구했다가 거절당했을 때 상처를 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상대방에 대한 신뢰도가 낮고 애착 관계를 형성하는 것 자체를 두려워한다. 자율성과 독립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친밀한 관계를 맺고 싶어 하지만 상대방이 자신과 멀어지든, 가까워지든 큰 감정을 보이지 않는다. 관계로부터 오는 스트레스를 피해 자신을 보호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불안형이다. 친밀한 관계를 맺는 데까지는 안정형과 유사하다. 하지만 서로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안정형과는 달리 상대방의 관심과 애정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해 과도한 불안감을 느끼고 집착하는 유형이다. 잠시 연락이 안 되는 이성 친구에게 백번씩 전화하는 사람들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네 번째는 혼란 형이다. 말 그대로 마음속으로 친밀한 관계를 누구보다 많이 원하지만, 상대방이 너무 가까워지는 것은 두려워하는 유형들이다. 이들은 언제든지 상대방에게 버려질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어서 상대방의 행동이나 말을 과대 해석하여 불안해하거나 서운해하기도 한다. 두려움을 숨기려 의도적으로 상대방에게 냉정하게 대하고 멀어지기를 시도하기도 한다.
오은영의 <금쪽 상담소>에서 자주 거론되는 문제 중의 하나가 애착 유형이다. 출연자들의 심리 고민을 상담하다 보면 종종 불안정한 애착 유형이 똬리를 틀고 있다. ‘애착’이란 개념을 처음 만들어 애착 이론의 아버지라 불리는 존 볼 비는 한 개인이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느끼는 매우 강렬하고 지속적인 정서적인 유대관계를 애착이라고 정의했다. 태어나 생존을 위해 형성한 애착 유형이 한 사람이 타인과 관계를 맺는데 기본 모델로 세팅 값이 정해지는 것이다. 연구에 따르면 부모-자녀 사이의 애착은 평생에 걸쳐 영향을 끼치고, 그다음 세대까지 전수된다고 한다. 즉 할머니의 애착 유형이 엄마에게 전해졌고, 엄마의 애착 유형이 나에게 전해졌으며 또 나의 애착 유형이 나의 딸에게 전달된다는 것이다. ‘관계 흙수저, 금수저’의 이론적 배경이기도 하다.
가난은 대를 물린다. 어느 한 명이 크게 각성하고 부를 쌓기 위해 한 푼 두 푼 모아 탈출하지 못한다면 계속 심리적 허기가 다음 세대로 전달될 수밖에 없는 슬픈 운명이다. 하지만 어렵다고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최근 어깨와 팔에 통증이 있어 필라테스 학원에 등록했다. 신체 상태를 점검했을 때 왼쪽 어깨와 골반이 솟아 있다고 해서 자세 교정을 시작했다. 그동안 나도 모르게 취하고 있었던 자세로 인해 틀어진 근육과 척추를 의식적으로 펴기가 쉽지 않았다. 좌절되는 순간도 있었지만,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교정하려고 노력하자 조금씩 자세가 바르게 되고 만성이었던 통증도 사라졌다.
잘 못 형성된 애착 유형을 교정하기 위해 다시 갓난아기 시절로 돌아갈 방법은 없다. 하지만 지금부터라도 의식적으로 나의 애착 유형을 살피고 건강하지 못한 부분을 교정하려 힘쓴다면 어느 순간 차곡차곡 부가 쌓이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 모두 자수성가해서 대를 이어 내려오는 가난으로부터 탈출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