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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막나비 Sep 28. 2022

모든 관계가 노동인 세상의 모든 미정 씨들께

      




“그냥 지쳤어요. 모든 관계가 노동이에요.”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 나온 대사이다. 여자 주인공 미정이 지하철을 타며 독백하듯 던진 말이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관계는 인간의 생존을 높여주는 고마운 것이었다. 다른 동물들에 비해 힘도 약하고 자신을 방어할 만한 수단이 별로 없었던 인류는 서로 관계를 맺고 무리 지어 생활 함으로써 생존확률을 높였다. 영화 <캐스트 어웨이>에서 무인도에 표류한 톰 행크스는 축구공에 얼굴을 그려놓고 정서적 허기를 채웠다. 관계란 인간의 생존에 있어 필수적이다.      


하지만 우리가 쓰는 에너지 대부분이 거의 ‘관계’에 소진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요즘 화두가 되는 번아웃 증후군도 공황과 같은 불안장애도, 우울증도 모두 관계에서 피어나는 곰팡이다. 어떤 전문가는 사실상 소진이 일을 많이 해서 생긴 것이라기보다 현대사회에서 끊임없이 자극되는 불안한 마음을 달래려 쉬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듯 소진하는 것이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너무 안쓰럽게도 우리는 자신을 한 방울의 에너지도 남아있지 않을 때까지 닦달함으로써 위로받는 것이다.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면 적당히 쉬기도 하고 농땡이도 부릴 줄 아는 사람보다 주어진 일에 성실하고 아등바등 열심히 사는 사람에게 번아웃이 찾아온다.     


우리는 왜 이토록 불안한 걸까?     


중국의 심리학자 황시투안은 두려움과 불안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두려움은 지금 발생하는 위협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따라서 위협 요소가 사라지면 자연히 사라지면, 두려움이 우리의 삶을 짓누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존을 보장한다. 그래서 우리는 두려움을 받아들이고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불안은 다르다. 불안은 미래에 생길 위협적인 것을 예측하는 감정적인 반응이고, 뇌가 상상해서 만드는 두려움이다. 일반적으로 적절한 불안은 뇌의 반응 속도와 경각심을 적절하게 향상하는 긍정적인 역할도 하지만 오래 또는 지나치게 불안해하면 우리는 부정적인 에너지의 울타리에 갇히게 되어 오히려 지키려 하는 모든 것을 잃어 자신을 위험에 처하게 한다.      


과거 우리 조상들과 비교해 경제적, 문화적으로 훨씬 더 윤택한 삶을 살고 있음에도 끊임없이 생존에 위협을 느끼며 불안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개인적 이유도 있겠지만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데서 오는 자극을 빼놓을 수 없다. 현대사회에서 타인과 비교하지 않기 위해선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어릴 때부터 각종 미디어, SNS, 또래 집단과 끊임없는 비교 문화에 노출되기 때문에 왠지 남들보다 자신의 모습이 부족하고 가진 것도 별로 없는 것 같이 느껴질 수밖에 없다. 자연스럽게 나의 안전을 지키기에 내가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보니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닦달하다 번아웃에 빠지거나, 극도의 불안감이 몸으로 표출되는 공황장애에 시달리거나, 열등한 자기에 대해 무력감을 느껴 우울증에 빠진다.  

    

인간의 욕구위계이론을 주창한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는, 인간의 욕구가 그 중요도에 따라 낮은 수준의 욕구에서 높은 수준의 욕구로 일련의 계층을 구성한다고 했다. 음식, 수면, 성욕, 주거 등 삶 자체를 유지하기 위한 생리적 욕구, 신체의 위험과 생리적 욕구의 박탈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안전 욕구,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소속감 및 애정욕구, 내적 외적으로 인정을 받길 원하는 존중 욕구, 잠재력을 극대화하고 자기완성을 바라는 자아실현 욕구, 그리고 자기 자신을 초월하여 다른 것을 만들어 내고자 하는 이타적인 자아 초월의 욕구로 나뉜다.  이 이론의 원칙은 다음과 같다.      



-인간은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는 결핍의 존재로서, 충족되지 않은 욕구만이 행동을 일으킨다.

-인간의 욕구는 충족되어야 할 순서대로 계층화되어 있어서, 하위 욕구가 충족되면 다음 단계의 충족을 위해 동기화된다.

-일단 욕구가 한 번 충족되어 만족감을 느끼고 나면, 사람은 그다음 단계의 고수준 욕구를 추구하게 된다.   


   

즉 대부분 우리가 불안하다 느끼는 것은 안전 욕구가 채워지지 않아서 비롯된다. 그중 80-90%는 우리의 뇌가 미래를 예측해 지어낸 허구에 의한 것이다. 그런데 뇌는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데이터를 수집한다. 미정이 모든 관계가 노동이라고 주장하며 해방되길 원하는 이유도 바로 불안함을 자극하는 끊임없는 피로에 더는 버틸 힘이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구 씨에게 미정은 이런 말을 한다. 


“그러니까 날 추앙해요. 가득 채워지게. 사랑으론 안돼. 나는 한 번도 가득 채워진 적이 없어요.”     

구 씨는 아무 말 없이 씩 웃으며 끊이던 라면을 건네 미정을 위로한다.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드라마는 미정의 구원 역시 관계에서 찾을 수 있음을 암시한다. 어린 시절 깜깜한 어둠 속에서도 엄마의 품만 있으면 별로 무섭지 않았다. 불안해도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사랑해주는 말 그대로 추앙해주는 한 명만 있다면 우리는 안전의 욕구를 넘어 더 큰 존재가 되는 힘이 생긴다. 그러나 현실에서 나를 추앙해 줄 사람은 거의 없다. 슬프지만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여기서 좀 더 나아가 황시투안은 불안을 잠재우려면 자신의 능력을 믿고, 어떤 일이 닥쳐도 해결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자기가치감을 가지라고 조언한다.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변화에 대처할 능력이 있다고 믿는 사람은 불확실성에 대해 불안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 자기가치감은 남이 만들어 주지 않는다. 바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자신을 스스로 믿을 때 조금씩 만들어지는 것이다.    

  

자 그러니까 이제부터 스스로를 추앙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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