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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간비행 Jan 09. 2022

코르셋 유감 (1)

노출과 존엄의 상관관계


'남자라면 언제나 핑크지.'

'요조숙녀에겐 역시 국방색이야.'

나는 남편과 이런 농담을 곧잘 한다.


성 고정관념을 비트는 농담을 유쾌하게 주고받음으로써, 우리는 스스로를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마인드의 소유자라고 자랑스레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Z세대 관점에서는, 어쩌면 성을 구별 짓는 것을 소재로 한 농담 자체가 옛 발상일 수 있다.




여성적 혹은 남성적

여성스럽거나 혹은 남성스럽거나. 오늘날의 성인지 감수성으로 볼 때 이런 이분법은 전원일기만큼 촌스럽다. 뿐만 아니라 타인의 외양을 통한 범주화는 폭력과 억압이 될 수 있기에, 그러한 기준과 평가는 지양해야 한다.


하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모래시계처럼 가슴과 엉덩이를 부풀리고 허리를 한껏 조여서 몸을 조작한 실루엣을 소위 '여성스럽다'라고 표현했다. 반대로 어깨를 강조하고 허리와 엉덩이의 편차를 줄이면 '여성스럽지 못하다'라고 평하곤 했다. 우리는 오랫동안 그러한 관념 속에 있었다.


그리고 패션은 특정 젠더를 표상하고 가시화하는 수단이 되어 우리의 고정관념을 더욱 공고히 하는데 일조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전통적으로 인간은 옷차림으로 그가 누구인지 식별했다. 남장을 한 여자가 남성으로 오해받으며 벌이는 해프닝이라던가, 반짝이는 드레스로 몸의 굴곡을 드러낸 여주인공에게 상대배우가 매료되는,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의 클리셰를 떠올려보면 납득이 갈 것이다.





아름다운 몸에 대한 강박

또한, 언제나 우리 몸을 둘러싸고 있는 패션은 시대가 요구하는 이상적 아름다움을 쫓아 우리 몸을 조작해왔다.  옥죄고 과장하면서.

우리 몸에 대한 미적 평가 기준은 시대에 따라 줄곧 달라져왔다. 하지만 그 변화는 줄곧 여성의 가슴, 허리, 엉덩이, 다리 위에서 이루어졌다.


시대가 요하는 획일화된 기준에 부합하도록 여성을 가두던 대표적인 아이템은, 바로 코르셋이다.  

코르셋은 역사 속에서 소위 '여성을 더 여성답게' 만들어 누군가에게는 지위와 힘을 부여하고, 누군가에게는 결핍과 착취의 원인을 제공했다.

(서양 복식의 역사 속에서 인간이 코르셋을 통해 어떻게 권위를 획득했고, 교양 있는 시민을 표상했는지는 다음 글에서 다룰 예정이다.)   


몸 조작이 당연히 받아들여진 시기에 보정속옷은 아이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1889 (출처 wikipedia.org)




헐렁한 옷은 페미니즘의 표현인가

MZ세대에게 가장 영향력 있는 뮤지션 중 한 명인 빌리 아일리시(Billies Eilish)는 음악과 SNS, 언론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쏟아내며 주목받았다. 특히 박시한 오버핏의 독특한 패션 스타일을 고수하는 이유에 대해서 타인이 자신의 몸을 평가하는 것을 듣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오버사이즈 의상을 입으면 내 몸매를 드러내지 않기에, 
누구도 내 몸에 대한 의견을 낼 수 없다.


빌리 아일리시의 이런 행보는, 여성 몸의 성적 대상화를 거부하는 많은 이들의 지지를 얻었다. 그런데 빌리 아일리시는 2019년  V Magazine 인터뷰에서 그러한 지지 속에도 슬럿 셰이밍* 숨어 있어 달갑지 않다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은 '당신이 소년처럼 옷을 입어서 너무 기뻐요. (덕분에) 다른 여성들도 소년처럼 옷을 입고 헤픈 여자가 되지 않을 수 있어요'라는 식의 응원을 보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 역시 여성을 어떤 특정 관념 속에 가둔다는 것이다.


나처럼 입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비난하는 방법으로,
나를 지지하는 이상한 흐름이 싫다.


실제로 그녀의 패션 스타일을 '정형화된 여성상에 대한 저항 메시지'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그건 사실이 아니라고 했다. 자신은 어떤 콘셉트로 스타일을 의도한다기보다 그냥 이런 스타일이 편해서 입는 것이고, 더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편하게 드러내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2020년 그래미 어워즈 애프터 파티의 빌리 아일리시 모습 (ⒸAFP)
빌리 아일리시의 평소 패션 (출처: 빌리 아일리시 인스타그램)




코르셋은 비난받아야 하는가

어쨌든 빌리 아일리시는 자신의 몸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해왔다. 오버사이즈의 패션 스타일을 고수하는 방식으로.

그녀의 뛰어난 음악적 재능과 더불어 패션 스타일도 늘 세상의 관심을 받았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은 각자의 해석에 따라 그녀의 오버사이즈 패션 스타일을 지지했다. 파격적 콘셉트의 화보를 촬영하기 전까지는.


2021년 6월 영국판 보그에 실린 빌리 아일리시의 화보는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코르셋을 착용한 채 맨살을 과감하게 드러낸 모습은 전형적인 핀업 걸* 스타일이었다.  더구나 이 화보의 콘셉트를 빌리 아일리시가 직접 제안했다는 것에 크게 충격을 받았다.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전형적인 핀업 걸 패션 스타일을 빌리 아일리시가..?!


이 화보 콘셉트가 이전의 행보와 다르기에 논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본인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빌리 아일리시는 보그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몸 긍정주의(Body-Positivity)를 실천하며 대체 왜 코르셋 화보를 촬영하냐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이라면 뭐든 할 수 있다고 믿는다.


빌리 아일리시의 진의와는 별개로, 어떤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변화에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보그 화보 촬영 이후 이어진 몇 번의 노출패션을 두고, 더 이상 노출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는 팬들이 있는가 하면, 전형적 내로남불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를 계기로 인스타그램 팔로워 중 무려 10만 명이 이탈했다. 빌리 아일리시 자신도 이러한 반응을 예견한 듯, 앞선 보그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당신이 살을 노출하고 싶다면 갑자기 위선자가 되는가?
쉬워 보이고 헤픈 여자(slut)가 되는가?
몸과 살을 보여주든 아니든, 그것이 개인의 존엄성을 결정하지 않는다.



2021년 6월 영국판 보그 표지 (출처 vogue.co.kr)
화보 콘셉트는 빌리 아일리시가 핀업걸에서 영감을 받아 직접 제안했다. (출처 vogue.co.kr)




패션과 젠더를 주제로 앞으로 몇 편의 글을 연재하고 싶은데, 막상 쓰려고 하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고민이 되어 한참 망설였다. 워낙 민감하고 복잡한 화두이기에 어떤 관점으로 얘기를 풀어가야 할지 부담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빌리 아일리시의 행보가 내게 여운을 주었고, 글쓰기를 다시 지속하도록 자극했다. 내 마음속 저 밑바닥에 있던 생각이, 당차고 야무진 그녀의 인터뷰를 읽으며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냥. 내가 멋지다고 생각하는 모습, 나다운 모습으로 표현해주는 것. 패션은 그래야 한다.

그래서 더 이상 패션이, 나의 존엄을 타인에게 평가받거나 누군가에게 종속되도록 하는 굴레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패션이 나를 자유롭고 기쁘게 하는 것이기를 희망한다.






*슬럿 셰이밍(Slut shaming): 보수적 사회 통념에 어긋나는 여성의 옷차림이나 태도를 비난하는 것

*핀업 걸(Pin-up girl): 미적 혹은 성적으로 이상화된 모습을 연출한 사진이나 그림 속의 여성. 핀으로 고정해놓고(pin-up) 감상하던 것에서 유래. 2차 세계대전 중 군인들이 핀업걸 이미지를 주로 소비하면서 1950년대 선정적 핀업걸 이미지는 패션 광고에 만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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