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옷이 상징하는 것
나는 20세기 끝자락에 공립 중. 고등학교를 다녔다.
당시에는 남학생/여학생을 구분해 반을 배정하는 일이 흔했고, 심지어는 남자반/여자반의 건물도 분리해 놓았다. 그리고 각각의 성에 따른 교육과정이 있었다.
나는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가사>와 <가정> 과목을 배웠다.
당시 나는 두 과목의 차이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기억나는 내용은.. 의류 소재별 세탁 방법과 계면활성제의 원리, 앞치마 만들기 및 샌드위치 만들기 실습, 5대 영양소가 균형을 이룬 식단 짜기, 모유 수유의 장점 외우기 등등이다.
아무튼 나는, 그 두 과목을 '엄마들이 하는 집안 일과 엄마들의 양육 의무'에 대한 교육으로 이해했다.
묘한 사춘기 반항심으로 가득했기에, 그 두 과목을 특히 싫어라 했다. 체육만큼 싫어했다.
내 미래가 ‘엄마’로 살도록 결정되어 있는 것 같아서 싫었다. (지금은 엄마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숭고한 일인지 알고 있고, 나는 결국 엄마가 되는 보통의 행복을 얻지 못했다.)
교양 있는 숙녀
그리고 또 떠오르는 강렬한 기억은,
당시 <가사>와 <가정> 선생님이 강조했던 '단정하고 조신한 숙녀의 옷차림과 태도'였다.
(여학생반의 가사와 가정, 남학생 반의 기술과 공업. 대게 두 과목의 교사는 동일인이었다.)
무릇 단정한 옷차림의 여성은 한여름일지라도 공식적 자리에서 맨다리를 내보여서는 안 되고, 코르셋을 착용해 군살이 드러나지 않게 해야 한단다. 그리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입을 다물고 웃어야 교양 있는 숙녀라고 했다.
중학생이 될 때 엄마는 내게 코르셋을 처음 사주셨고, 나는 꽤 오랫동안 코르셋을 착용했다.
오버사이즈 룩이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전인, 불과 몇 년 전 까지도 코르셋은 늘 옷장 한편에 있었다. 그리고 '잘 차려입어야 할 때'에는 코르셋을 입곤 했다. 회사의 큰 대외 이벤트가 있다거나 많은 사람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한다거나.
코르셋의 엄청난 탄성은 나의 물렁한 허리를 잘록하게, 퉁퉁한 똥배를 납작하게, 축 늘어진 엉덩이를 잡아 올린다. 코르셋을 착용했을 때의 압박감은 몸과 마음을 한껏 긴장시킨다. 허리를 구부정하게 하지 못하고, 음식을 양껏 먹거나 크게 입 벌려 웃는 것이 쉽지 않다. 저절로 소위 '교양 있는 숙녀', '제대로 교육받은 여자'가 되어 버린다.
코르셋의 역사
도대체 여자들은 왜, 언제부터 코르셋을 입기 시작했나?
대부분의 복식사 서적은 크레타섬 크노소스 궁에서 발견된 BC 1600년경의 '뱀의 여신'에서 코르셋의 원형을 찾는다. 그러나 실제 그 역할과 기능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않았으니, 단정 지을 수 없다.
중세를 거쳐 르네상스에 이르러서, 여성들의 의상은 상의와 하의, 즉 보디스(Bodice)와 스커트의 분리가 보편화된다. 겉옷을 제외한 거의 모든 의상은 허리의 위치를 드러내게 되었다. 이로 인해 여자들 옷의 형태는 느슨하게 걸치는 드레이퍼리(drapery)에서 허리를 조이는 실루엣으로 이행된다.
르네상스 시기의 코르셋은 속옷이라기보다 옷의 일부였다. 여성 드레스의 가슴부터 배까지 다양한 장식의 스토머커(stomacher)라는 것을 덧붙였는데, 이 스토머커 안에 고래수염과 같은 구조물을 삽입해 배를 납작하게 만들었다. 스토머커는 어찌나 뻣뻣하고 견고했는지, 방심하고 상체를 숙였다가 갈비뼈가 부러지는 사고가 종종 있었다고 한다.
당시 돈 많고 지체 높은 여성들은 스토머커의 끝을 뾰족한 예각의 형태로 해 허리를 더욱 가늘고 날렵하게 보이도록 하고, 스커트는 기하학적으로 부풀렸으며, 목둘레에는 마치 후광처럼 보이도록 큰 러프 칼라를 부착했다. 당시 사람들은 '새로운 세상에 걸맞은 진취적인 인간상'은 이러한 몸을 가져야 한다 여겼을 것이다.
바로크 시기의 여성 드레스는 잠시 느슨해진 것처럼 보이지만, 더욱 촘촘하게 뼈대를 넣어 '코르셋(corset)'이라는 명칭의 의류를 고안했다. 이때 이후로 코르셋은 스토머커와 분리되어 드레스 안쪽으로 숨어 들어갔을 뿐 여성들의 패션에서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 후로도 수백 년간.
여성의 잘록한 허리가 상징하는 것, 사회적 지위
왜 여성들은 잘록한 허리에 왜 집착하게 된 걸까?
그 이유를 섹슈얼리티와 페티시즘의 관점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나의 소견은 패션을 통한 과시욕이 코르셋 기원중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한다. 내가 제일 잘 나가~! 를 직관적으로 보여주기에, 패션만큼 효율적인 것이 또 있을까?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의 우월함을 드러내어 타인에게 힘을 행사하려 하고, 패션은 늘 그러한 인간의 본성을 거드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코르셋은 일단 너무 불편하다. 극도로 뻣뻣하고 또 화려한 코르셋을 입는다는 것은 노동하지 않는 계층을 의미한다. 물론 코르셋을 입는 하층민도 있었다. 단지 이들이 입었던 느슨하고 엉성한 지지대가 들어간 코르셋은 마구간을 치우고, 감자를 캘 때 갈비뼈를 부러뜨리지 않을 정도의 신체 압박이었을 것이다.
유럽의 왕가와 귀족 여성들은 경쟁적으로 더 가는 허리를 만들려 애썼다. 프랑스 앙리 2세(Henri II, 1547-1559)의 왕비였던 카트린느 드 메디치(Catherine de Médicis)는 허리둘레를 13인치로 만들고자 노력했다.(성공했다는 기록은 없다) 오랫동안 서구 사회의 사회적 지위가 높은 여성들은 자신이 가진 것들을 더욱 확연하게 드러내기 위해 허리를 더욱 옥죄었다. 코르셋 속에 몸을 욱여넣기 위해 분투하며, 시중드는 사람들의 힘을 빌어 몸을 변형시켰다.
코르셋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Elisabeth von Wittelsbach, 1837-1898) 황후이다. 엘리자베트는 씨씨(Sissi)라는 애칭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당시 유럽 여성들의 워너비였다. 왜냐하면 그녀는 당대 미의 기준인 '잘록한 허리'의 대명사! 무려 16인치의 허리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코르셋의 역사와 아이러니에서 씨씨 공주를 언급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 더 있다.
씨씨는 잘록한 허리와 아름다운 외모를 가꾸는 데에 집착이 대단했고, 파리에서 특별 주문한 가죽 코르셋을 입는데 한 시간 이상을 투자해 모두가 칭송하는 예쁜 몸매를 지켰다. 또한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도 코르셋은 그녀를 얼마간 지켜주었다.
1898년 씨씨가 스위스 제네바에서 괴한에게 습격당했을 때, 불행하게도 칼이 그녀의 심장을 관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씨씨는 백 여미터를 걸어가 도움을 청하고 몇 시간을 버텨낸 후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부검의들은 그녀가 사랑했던 특별한 코르셋이 지혈 작용을 한 덕분에 사망시간이 지연되었다고 했다.
씨씨 공주 일화는 내가 복식사에서 찾아낸 몇 안 되는 '코르셋의 순기능' 중 하나이다.
사실 내가 코르셋에 대해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것의 역사와 유래가 아니다.
아름다움의 기준은 누가 만드는가? 엄청난 고통을 감수해야 할 만큼 신체를 왜곡하고 억압하는 아름다움이 가치 있는 것인가? 이상적 시대 미와 유행을 따르며 자기 몸을 혹사하는 여성들의 자발성을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 그리고 과연 그 자발성은 정말 자발적인가?
뭐. 나의 의문들은 너무 원론적이라서 정답이랄 게 없거나, 누구도 단적으로 답할 수 없는 공허한 외침일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용기 내어 다음 이야기로 이어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