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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간비행 Jun 11. 2022

타인의 고통 (1)

패션 산업의 그림자

나는 대리를 싫어한다.

직장생활 5년 남짓을 넘기면 주어지는 '대리'라는 직급을 단 사람들 말이다.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축적된 업무 경험과 노하우로 대리는 중요한 일들을 곧잘 해내어 조직의 허리 역할을 한다. 직무에 능숙하며, 조직이 자신을 필요로 하는 것을 인지하는 대리들은 자신감이 넘친다. 때로는 매우 오만하다. 


패션 브랜드의 대리들은 소위 '특종'이라 불리는 제작 난이도가 높은 외주 아이템을 담당한다. 특종은 일반적인 봉제 공장에서 다루지 않는 데님, 패딩, 가죽, 퍼 아이템 등에 해당한다. 디자인은 본사에서 기획하지만, 소재 선택 단계 및 수량 기획부터 외주업체와 긴밀하게 소통해야 한다. 패션 브랜드 즉 발주처의 담당자는 대리급 디자이너이고, 외주업체에서는 팀장이나 임원급 직원이 담당하는 경우가 많다. 때로는 외주업체 대표가 직접 나서기도 한다.


나에게도 그런 시기가 있었다.

내 직무의 전문성을 막 인정받기 시작하고, 모든 것에 자신감이 충만했던 그 시절. 나는 제작이 어려운 현란한 디테일을 디자인에 잔뜩 집어넣고, 내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외주 업체들과 기싸움을 벌이곤 했다. 이미 형성되어 있는 시장 가격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은 알고 있지만, 동급 브랜드의 다른 디자이너들이 하지 않았던 온갖 이펙트를 재주 부리듯이 아득바득 넣어 뭔가 대단한 것을 만들고 싶었다.




그때 유난히 납기일을 잘 못 맞추던 데님 외주 업체가 있었다.

터키에서 사입한 원단이 늦어져서. 새로 개발한 금속 버튼이 빨리 안 나와서. 중국 연휴가 한국보다 길어서. 공장장이 아파서... 등등 이유는 대게 비슷했다. 그중 가장 자주 언급하는 사유는 디자인이 어려워서 작업 속도가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결국은 그쪽의 주장은 내가 현실감 떨어지는 디자이너이고, 나의 디자인도 채산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대체. 왜?

발주시기에는 어떻게든 맞춰보겠다! 가능할 것이다!라는 희망찬 대답을 해놓고, 꼭 납기에 이르면 화살을 내게 돌리는 것인가. 

이렇게 따지고 들면 또 그쪽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내가 너무 무섭게 몰아붙여서 거절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내가 '너무 무서운 대리'라는 거다. 아무튼 납기일 지연 문제로 내가 들었던 가장 창의적인 이유는 이것이다. 폭우로 공장이 침수되어 작업한 물량을 전부 폐기하고 다시 진행해야 한다!


뭐. 뭐라고요? 익스큐즈 미??

작년에도 침수되었다고 해놓고, 올해도 또? 21세기에 침수라고요? 왜 수해지역에서 같은 피해를 반복해서 당하고 있는 건가요? 대책을 세우셨어야죠! 나보고 지금 그 말을 믿으라고요?


정확하게 어떤 워딩으로 반응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스스로를 대체로 예의 바른 편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시절의 나는 재수 없는 인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너무 무서운 대리'였으니까.

확실한 사실은 그때 나는 데님 외주업체 측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별 핑계를 다 댄다고 생각했고, 나를 물렁하게 본다고 발끈했었다.


어느 날, 생산부장님이 나에게 데님 워싱 공장에 같이 가자고 요청했다. 빨리 판단하고 결정지어야 할 사안들이 많아, 담당 디자이너가 함께 가면 일 진행에 속도가 붙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매일 새벽 별 보며 퇴근하던 나로서는 외근은 정말 내키지 않는 것이었다. 서울 강남 한 복판의 회사에서부터 경기 북부 끝자락에 있는 워싱 공장까지는 왕복 네 시간. 그곳에서 해당 사안들을 확인하고 컨펌할 것까지 계산하면 하루가 다 가버릴 것이고, 나의 야근은 더 길어질 거니까.


아무튼 세상에서 내가 제일 바쁜 줄 알던 나로서는 데님 워싱 공장에 가는 것은 무척 어려운 발걸음이었는데, 결과적으로 그 일은 내 삶의 큰 사건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날 그곳에서 내 눈으로 본 것들은 패션 디자이너로서의 사고와 인식에 어떤 중요한 전환이 되었다.  




서울에서 2시간 정도를 자동차로 달려서 외곽순환도로와 산과 들과 논을 지나, 구불구불한 비포장 도로를 한참 따라가니 거대한 공장이 나타났다. 공장이 가까워오자 기분 나쁜 냄새가 풍겼다. 그리고 마침내 수증기가 가득한 공장에 들어서자 자극적인 화학약품 냄새가 진동했다. 눈이 매웠고 목이 아팠다.


첫 번째 충격은 이것이었다. 이런 환경을 누군가는 매일 일상처럼 겪어야 한다는 것.  

그들은 대부분 눈이 큰 외국인이었다. 그곳의 노동자들은 거대한 워싱 기계 속에 상체를 집어넣고 옷을 잡아 빼거나, 이쪽에서 저쪽 기계로 물건을 옮기고 있었다. 모래를 분사해 데님의 부분 탈색 효과를 만들거나, 사람 다리처럼 생긴 틀에 청바지를 끼워 고정하고 화학 약품으로 이펙트를 만들고 있었다. 

강한 열기와 약품 냄새가 뒤섞여 작업하는 사람들 가까이 다가갈수록 기침이 나고 눈물이 났다. 쉴 새 없이 돌아가는 기계 소음에 귀가 먹먹했다.

잠시 방문한 내가 이렇게 불편하고 힘든 이 환경이 누군가에겐 일상이고, 일터라니.


작업 중인 공장 노동자들을 보면서 먼 옛날이야기처럼 아득히 잊고 있던 사실이 상기되었다. 언뜻 최첨단을 달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화려한 패션 산업의 제조 공정 대부분은 여전히 사람 손으로 이루어진다는 것 말이다. 내가 원하는 물 빠짐 정도, 올풀림 효과, 주름 모양, 틴 컬러를 만들기 위해서 누군가가 손으로 작업하며 육안으로 확인해야만 한다. 완전한 자동화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제조 공정에 사람의 노동력이 들어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나는 그 작업 환경에 대해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잊고 있었다.


패션 산업은 더 적은 비용으로, 더 많이, 더 빠르게 생산하게 위해 경쟁적으로 값싼 인력을 찾아 헤맨다. 임금이 낮은 외국인 노동자를 불러들이거나, 더 비용을 낮출 수 있는 해외로 생산처를 옮겨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수단을 가진 자들이 더 효율적으로 생산하려는 노력은 합당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안전과 공정의 측면에서 아직 사회적으로 합의되지 못한 모호한 경계에서 늘 고통받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다.
더 궁핍하고, 더 어리숙한 사람들.


중국 광저우 데님 공장 노동자들. 어린 소년은 청바지 한 벌의 실밥을 제거하고 한화 약 28원을 받는다. (ⒸLu Guang/Greenpeace 출처:theguardian.com)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청바지 바라본다. 

멋스러운 주름? 그거 누군가가 손으로 만든 것이다. 백도가 넘는 고온의 철판 위에서.

무릎에 아슬아슬하게 생긴 대미지(damage) 효과? 그것도 누군가가 손으로 그라인드 해 놓은 것이다. 먼지 마셔가면서.

허벅지와 엉덩이의 은은한 물 빠짐? 샌드 블러스트 건(sandblast gun)으로 누군가가 탈색한 것이다. 규폐증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백화점에서 17만 8천 원에 팔리던 내가 디자인 한 그 청바지, 수십 명의 손을 거치는 워싱 가격은 6천 원에도 못 미친다. 그런데 또 거기서 나는 자본가의 충실하고도 잘 훈련된 개처럼 가격은 깎아달라 떼쓰고, 공정은 추가해달라고 우기고 있었다. 마진율이 높다고 내 월급이 올라가는 것이 아닌 줄 알면서도. 그때는 그것이 디자이너의 열정이라고 생각했었다. 선배들이 몸소 보여줬던 '안되면 되게 하라!' 정신을 마음에 고이 품고, 조금이라도 덜 주고 더 챙겨 와 회사에 보탬이 되고자 악을 써댔다. 나는 한때 그렇게, 쓸모 있는 디자이너로 인정받고자 안간힘을 쓰고 살았었다.


오늘도 인터넷에서 '청바지 한벌에 9,900원!'이라는 국내 패스트 패션(Fast Fashion) 브랜드의 팝업 광고를 보았다.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상상하기도 싫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계속 생각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뭘까.


곰곰이 생각한 끝에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쇼핑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아마 패션 액티비즘(Fashion Activism)에 앞장서는 대단한 운동가는 못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조금씩이라도, 내가 본 것과 알고 있는 것들을 얘기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패션 산업의 그림자를 잘 알지 못했던 누군가의 가슴에 이 글이 닿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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