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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간비행 Jul 17. 2022

타인의 고통 (2)

털은 본래 그들 것이다


보통 패션 업계의 시간은 반년을 앞서있다. 브랜드의 성격에 따라 그 주기는 다르기도 하지만 원단을 발주하고, 디자인 개발과 품평을 통해 상품성을 점검하고, 생산 과정을 마치고 유통되기까지 대체로 6개월이 걸린다. 이렇게 반년 가량 앞서 살다 보면 현실감각이 아둔해진다. 특히 나의 경우는 겨울 상품을 기획하는 한 여름에 감각의 균열을 느끼곤 했다.  

내 육신은 뜨거운 햇살이 작렬하는 계절의 시간 속에 있지만, 다가올 겨울을 상상하며 디자인을 구상하느라 내 마음은 겨울을 향해 달려간다. 창 밖의 아스팔트는 이글거리는데, 정수리에 내리 꽂히는 차가운 에어컨 공기에 몸이 한없이 움츠러든다.


그 계절, 나는 종종 어질어질하고 정체모를 이상한 마음에 기분에 썩 좋지 않았다. 그때는 그토록 복잡한 감정에 스스로 이름을 붙일 수 없었지만, 지금은 알 수 있다. 그것은 죄책감이었다.




대부분의 브랜드들은 겨울 상품으로써 가죽재킷, 모피코트, 덕다운, 구스다운 등을 기획한다. 전체가 가죽이나 모피로 되어 있는 상품이 아니더라도 모직코트 칼라에 덧붙이는 여우털이나 토끼털, 패딩 점퍼 후드의 라쿤 트리밍 등 모피를 아예 배제하고 겨울상품을 기획하는 경우는 드물다.

이때 일선 디자이너가 담당하는 가장 첫 번째는 단계는 원자재에 해당하는 동물의 털가죽을 고르는 것이다. 패션 상품으로써의 모피 이전에 원자재는 보통 ‘원피’라고 불렀는데, 동물의 형상을 가늠할 수 있을 정도로 가죽을 그대로 벗겨놓은 상태가 대부분이다. 이를테면 팔다리 가죽이 몸통에 그대로 붙어 있고, 작은 동물의 경우 머리가죽이 붙어 있기도 하다.


갓 태어난 새끼양의 최상급 원피예요. 만져보세요.


갓 태어난 새끼의 모피, 심지어는 어미 뱃속에서 꺼낸 태아의 최상급 모피의 촉감을 확인해보라는 외주업체 담당자의 제안을 따라 나는 마지못해 그것들을 쓸어 만지곤 했다. 그러다 보면 자꾸만 우리 집 막둥이 몰티즈 등을 쓰다듬는 감촉이 오버랩되면서 내장이 요동쳐댔다. 사지와 머리 가죽이 붙어 있는 원피는 그것이 그냥 의류 원자재가 아니라 살아 숨 쉬던 하나의 생명이었음을 더 분명히 보여준다.


모피나 가죽을 패션상품으로 소비하던 입장에서, 그것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어디로부터 오는지 차츰 알게 될수록 견딜 수 없이 불편해졌다. 각종 미디어를 통해 알면 알수록, 저비용 고효율이란 이름으로 행하는 인간의 잔인함은 추악하고 역겨웠다.


난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것일까. SNS에는 반려견 사진을 게재하고 동물구조협회에 후원을 하면서, 동시에 모피 상품을 사는 행위 사이의 모순이라니. 게다가 더 잘 팔리는 모피 상품을 디자인해 소비를 부추기는 것이 내 일인데, 내가 선택한 일은 내 삶의 가치와 부합하는가.

나는 스스로에게 떳떳할 수 있을까, 무척 혼란스러웠다.




그들도 우리처럼 아프다

사실, 동물의 털과 가죽은 인류 최초의 의복 소재라고 할 수 있다. 수만 년 전부터 인류는 사냥으로 얻은 동물의 털과 가죽으로 몸을 감싸고 살아 남아 지구 곳곳으로 삶의 터전을 넓혀 갔다. 그렇다면 원시시대의 털 옷과 오늘날의 모피 패션에 똑같은 사회적・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나는 이 물음에 대해 두 가지 측면에서 얘기하고 싶다.
우선 첫 번째는 생존을 위한 필수품이냐 과시를 위한 장식품이냐의 관점을 논할 수 있을 것이다. 원시시대의 인간은 수렵을 통해 식량을 확보했고, 그 과정에서 동물 털과 가죽은 얻어 생존을 위해 활용했다. 이 경우 동물의 털은 사냥의 부산물로써 자연스럽게 얻어졌을 것이다. 물론, 모두가 사냥에 능숙한 것은 아니므로, 특정 동물의 모피나 희소가치가 있는 것은 어떤 능력과 지위를 가진 자들이 독점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옷은 필수품을 넘어서서 권위를 상징하는 장식적 기능을 할 수도 있다. 특정 모피는 '나 이런 사람이야!'라고 으스대기에 딱 좋은 수단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시효과는 수세기를 이어져오며 모피는 곧 '럭셔리'를 상징하게 되었다.

두 번째 논점은 모피를 얻기 위해 인간이 동물에게 행하는 가학성과 환경파괴이다.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도달한 이래로 비버를 비롯한 라쿤, 여유, 곰의 숫자가 급격히 감소했다. 왜? 서유럽에서 상류층을 상징하는 모피를 얻기 위해 아메리카 인디언과 교역이 이루어지면서, 무분별한 동물 포획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북아메리카 인디언과 유럽의 모피 교역 이전에도 원주민들은 비버를 식량으로 삼거나, 사냥을 통해 모피옷을 만들어 입었다. 그들은 모든 것은 자연이 주는 선물로 인식하였기에 사냥한 동물의 영혼을 달래주는 의식을 치러 감사함을 표현했으며, 살코기와 뼈, 털과 가죽을 모두 소중히 다뤘다. 이때 비버는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자연의 일부가 된다.

그러나 비버가 유럽의 모피 수요를 위한 상품으로 전락하게 되면서, 대량 포획이 자행되고 멸종 직전까지 이르렀다. 하나의 종이 사라진다는 것은 그것과 관련된 생태계를 흔드는 사건이다. 비버가 짓는 댐은 늪을 이루고 많은 생물들이 서식하는데, 비버가 사라진 지역에서는 이러한 생태계 환경이 파괴되었다. 또한 먹이 사슬로 연결된 늑대, 코요테, 곰, 악어 등의 개체수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현대에 이르러 대량 사육으로 모피 의류가 생산되어 모피의 대중화가 이루어졌다. 모피는 과거와 같은 최상위층이 독점하는 고가품은 더 이상 아니지만 여전히 고급품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이를테면 한국에서는 예물이나 예단으로 밍크코트를 주고받는 일이 흔하고, 결혼식 등 잘 갖춰 입어야 하는 자리에는 모피코트를 차려입는 어르신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문제는 '모피의 대중화' 이면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이다.

국제 동물보호단체 PETA의 자료에 따르면 일반 소비자에게 판매되는 모피 의류의 80%는 대부분 중국이나 인도, 파키스탄 등에서 공장식 축산으로 생산된다. 동물들은 비좁은 철창에서 나고 자라 오직 죽음을 맞이할 때만 그곳을 나올 수 있다. 각 동물의 수명이나 성장 시기와 상관없이 '효율'을 고려해 도축되는 시기는 보통 생후 6개월이라고 한다. 또한 6개월의 시간 동안 상품이 훼손되지 않게 하기 위해 발톱을 뽑고, 모피량을 늘리기 위해 억지로 살을 찌우는 지옥과 같은 고통의 시간을 보낸다. 초원에서 사육되는 양들이라고 고통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린양들은 털 관리를 위해 항문 주변의 살을 도려내는 뮬싱(Mulesing)을 한다. 물론 적절한 치료나 마취 따위는 없다.

공장식 축산 동물의 도축 과정은 끔찍하기 이를 데 없다. 인간들은 질 좋은 모피를 얻기 위해 동물을 몽둥이나 전기로 기절시켜 산채로 가죽을 벗겨낸다. 의식이 돌아온 동물들은 고통 속에 몸부림치며 죽어간다. 만약 당신이 동물보호단체나 환경단체가 제공하는 도축 영상을 본다면, 아마 며칠 밤을 악몽에 시달리다 깨어나 눈물을 흘릴지도 모른다. 나는 그랬다.       




퍼 프리(Fur Free) 캠페인

수년 전부터 '지속가능성'이 디자인계의 화두로 떠오르며 환경과 동물권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며, 패션산업계는 비판적 시선을 더 이상 모른 채 할 수 없게 되었다. 더군다나 현재 소비문화의 핵심층을 이루는 MZ세대는 가치 있는 소비를 지향하고 윤리적 브랜드를 선택하는 성향이 크다.

그것이 소비자의 환심을 사기 위한 위선인지, 진정성 있는 브랜드 철학인지 알 수 없지만 '더 이상 모피를 사용하지 않겠노라'라고 공언하는 패션 브랜드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그중 가장 큰 반향을 일으킨 것은 2017년 Gucci의 퍼 프리(Fur Free) 선언이었다. 알레산드로 미켈레가 구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영입된 이래 구찌는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하며 패션계에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상류층의 여행용 가죽 가방과 마구 용품으로 출범한 구찌라는 브랜드의 상징성, 그리고 모피 상품의 매출 비중이 적지 않은 럭셔리 브랜드인 구찌가 퍼 프리를 선언함으로써 패션계에 거대한 파급 효과가 일어났다.


패션계의 관행처럼 여겨졌던 동물을 입는 행위에 대한 윤리적, 환경적 측면에서 논의가 활발해졌고, 점차 많은 럭셔리 브랜드들도 퍼 프리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코치, 지미 추, 톰 포드 등이 뜻을 같이했고, 2018년 버버리의 CEO 마르코 고베티는 '럭셔리의 현대적 의미는 사회적. 환경적으로 책임의식을 가지는 것'이라고 말하며 퍼 프리 캠페인에 동참했다. 현재는 럭셔리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샤넬을 비롯해 프라다, 베르사체 등도 퍼 프리를 실천하고 있다. 또한 구찌가 소속된 케링(Kering) 그룹의 발렌시아가, 생 로랑, 보테가 베네타, 알렉산더 맥퀸 등도 2022년 가을 겨울 상품을 시작으로 더 이상 모피 제품을 생산하지 않는다.


퍼 프리 캠페인은 럭셔리 브랜드뿐만 아니라 패션계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세계 4대 패션쇼 중 하나인 런던 패션위크도 모피 제품을 퇴출시켰고, 패션 매거진 엘르(Elle)는 모피 상품 사진을 매거진에 싣지 않는 것으로 이에 동참하고 있다. 덴마크,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노르웨이, 벨기에,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등은  모피 농업 자체를 영구 금지시켰다.





인류는 동물 털을 뒤집어써야 할 만큼 더 이상 기후와 환경의 위협을 받지 않지만, '패셔너블'이란 이름으로 오랫동안 모피 패션을 포기하지 못했다. 남들보다 우월해 보이고 싶은 욕망 때문에.

그런데 최근 몇 년간 패션 산업계 전반에서 일어나는 퍼 프리 캠페인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세상은 변했고, 우리는 깨우쳐가고 있다.

그들도 우리 똑같이 고통을 느끼는 생명체라는 너무 당연한 사실을. 인지심리학자 스티븐 핑커(Steven Arthur Pinker)의 주장처럼 동물권을 생각하고 더 나은 환경을 만들려는 노력은 단지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감각을 지닌 다른 존재의 권리를 생각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은, 결국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과 범죄를 줄이는 것으로 확장된다.


인간이 이곳의 주인이라는 오만함을 버리고, 타자의 고통을 헤아리며 모두에게 더 나은 환경을 고민하는 것은 참된 인간성을 회복하는 첫걸음이다.

그리고 동물 단체의 슬로건처럼 '동물의 털은 본래 그들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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