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스트 패션과 소비라는 놀이
나는 글로벌 럭셔리 패션 브랜드의 일원으로 일했던 적도 있고, 국내 저가 캐주얼 브랜드를 기획하고 디자인한 적도 있다. 무슨 말이고 하니, 수백만 원짜리 옷부터 몇천 원짜리 옷을 만드는 패션회사의 디자인 업무를 두루 겪었다는 것이다. 패션을 사랑하는 디자이너라면 가격의 높고 낮음을 떠나서, 옷을 만들 때 온 정성을 쏟고 최선을 다하는 것은 다 똑같을 것이다. 다만, 각각의 브랜드가 포지셔닝한 시장 가격과 유통 형태에 따라 주 고객층이 다르고, 구매 목적이 다르고, 생산주기가 다르다 보니 옷의 수명도 달라진다.
유명 여성복 브랜드에서 이지 캐주얼로 이직했을 때, 좀 더 솔직한 심정을 고백하자면 더 편하게 일하고 싶은 목적이 컸다. 아무래도 가격대가 낮아지면 디테일이 적어지고, 좀 더 쉽게 쉽게 일을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건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다. 생산 주기상 결정도 빨리해야 했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덜 예민하고 더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을 가진 유쾌한 이들이었다.
그런데 아이템 가짓수가 늘어나다 보니 옷 하나하나 신경을 덜 쓰게 되는 건 맞지만, 내가 쓰는 에너지의 총량은 이전과 매한가지였다. 나는 여전히 번아웃 상태로 남아있는 한 방울의 영혼까지 쥐어짜 내고 좀비처럼 살고 있었다. 이전과 달라진 점이라면, 이제 내가 만든 저가의 옷은 소비자에게 선택되었다가 더 빨리 버려진다는 점이랄까. 그건 무척 허탈한 일이었다.
우리가 지구를 더럽히는 쓰레기를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요?
유럽 쇼룸 관계자 품평을 준비하며 정신없이 바쁘게 지내던 어느 날, 나와 가깝게 지내던 디자인 팀장이 던진 말에 나는 무척 뜨끔했다.
비슷한 시기에 같은 대기업에서 이직해 온 이 친구를 나는 무척 좋아했다. 이 친구는 똑똑하지만 겸손하고, 자기 소신에 따라 행동하고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이었다. 본인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묵묵히 그리고 꾸준히 실천하는 조용한 혁명가 타입이었다. 반면 나는 현실에 대해 투덜거리곤 하지만 제도권 벗어나기를 두려워하는, 입만 살아있는 몽상가랄까.
'그렇지만 어쩔 수 없잖아' 하고 내가 현실과 타협했을 때, 이 친구는 자기 생각대로 무언가 실천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몇 년 뒤 동시에 퇴사를 하게 되었다. 나는 더 큰 대기업의 저가 브랜드로 이직해 제도권에 머물렀고, 이 친구는 작게나마 자기 사업으로 독립했다. 당시 대중에게 그다지 친숙하지 않았던 '지속가능성'에 목표를 둔 패션 브랜드였다. 또한 이 친구는 채식을 실천하여 완전한 비건이 되었고, 환경과 인간 모두에게 이로운 옷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노력 중이다.
패스트 패션의 시대
기술의 발전은 인간의 의생활에 많은 편리함을 가져다주었다. 재봉틀이 개발되어 손으로 바느질하는 수고를 덜어 주었고, 기계화를 통해 기성복의 시대가 도래했다. 용도에 맞는 옷감과 장식을 고르고 신체 치수에 맞춰 옷을 만들어 입던 이전 시대의 수고와 기다림은 사라졌다.
많이 만들수록 가격은 낮아진다. 대량 생산된 제품은 더 저렴한 가격에 빠르게 소비자에게 공급된다. 이제 새 옷을 사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트렌드를 쫓아 새로운 의류를 구매하는 패션 소비는 하나의 즐거움이 되었으며, 현대인에게 소비는 문화이자 놀이이다. 패션 소비라는 놀이를 더욱 빠르게 확산시킨 것은 패스트 패션이다.
1990년대 후반 최신의 유행을 빠르게 제공하는 패스트 패션(Fast Fashion)이 대거 등장했다. 패스트 패션은 SPA(Specialty Retailer of Private-label apparel 자가상표 부착 유통방식)라 부르기도 하는데, 생산자가 자가 라벨을 붙여 직접 대형 매장을 운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자라(Zara), 망고(Mango), 에이치 앤 앰(H&M), 유니클로(Uniqlo), 갭(Gap)등의 해외 브랜드와 에잇 세컨즈, 탑텐(Top Ten), 스파오(SPAO) 등 국내 브랜드가 이에 해당한다. 백화점이나 거대 온라인 유통 플랫폼과 같은 중간 유통단계가 빠지면 판매수수료가 절감된다.
패스트 패션은 마치 맥도날드와 같은 패스트푸드가 그러하듯, 보다 민첩하게 소비자 욕구에 반응하며 빠르게 상품을 공급한다. 그래서 '맥 패션'이라 부르기도 한다. 보통의 패션 브랜드가 한 계절 내내 같은 컬렉션을 매장에 진열해 놓는 반면, 패스트 패션은 2-3주 주기로 상품이 바뀐다.
과잉생산과 과잉소비
과잉생산은 과잉소비를 부추긴다. 통계에 따르면 미국인의 1인당 의류 소비량은 1980년대보다 5배 증가했다. 평균 5.5일마다 새 옷을 구매하고, 옷 한 벌 당 착용하는 횟수는 평균 7회이다.
패스트 패션 덕분에 소비자는 쉽게 지갑을 열어 일시적 만족을 얻고, 잠시 입다가 또 망설임 없이 버린다.
79억 명이 사는 지구에서 한 해동안 생산되는 옷은 약 1,000억 벌이고, 그중 330억 벌이 같은 해에 폐기된다. 팔리지 않은 재고, 한철 입고 버리는 옷 등이 이에 해당한다.
2018년 7월 버버리는 한 해 동안 2,860만 파운드(한화 약 420억 원)에 달하는 재고 물량을 소각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크게 비난을 받았다. 불과 두 달 전 버버리는 패션 폐기물을 줄이고 자원을 순환시키는 운동에 동참해 순환경제에 헌신하겠다고 밝혔다. 그런데 팔리지 않은 제품을 불태워 없애버리는 언행일치의 모순적 행동을 한 것이다.
사실 버버리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고가 브랜드들에게 재고를 소각하는 것은 그동안 관행이었다. 일반 패션 브랜드들이 세일을 하거나 재고를 시중에 유통시켜 생산비용을 회수하는데 비해, 럭셔리 브랜드는 희소가치와 네임밸류를 지키기 위해 재고를 소각하거나 파쇄한다. 일례로 럭셔리 시계 브랜드 까르띠에(Cartier), 몽블랑(Mont Blanc), 피아제(Piaget) 등을 소유한 리치몬트 그룹(Compagnie Financière Richemont SA)은 재고 상품이 회색시장에 유통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소매업자들로부터 다시 물품을 사들였다. 리치몬트 그룹은 2년간 4억 8천만 유로(한화 약 6,359억 원) 상당의 자사 시계를 사들여 파쇄했다.
고가의 패션 재고 상품만 소각하거나 파쇄하는 것은 아니다. 나이키는 재고를 폐기하기 전에 시중에 유통되지 못하도록 절단한 사실이 있다. H&M과 같은 패스트 패션 브랜드도 제품 훼손과 안전기준 등의 여러 가지 이유로 재고를 소각하고나 폐기 처리해 왔다.
알려졌다시피 패션 상품이 만들어지기까지 엄청난 에너지와 자원을 사용하고 공해를 일으킨다. 그런데 다 팔리지 않을 것을 이미 알면서 과잉 생산하고, 팔리지 않은 재고를 폐기해 또 공해를 만든다니. 이 얼마나 헛된 일인가!
그 많던 옷은 다 어디로 갔을까?
우리가 충동적으로 샀다가, 싫증이 나 버린 옷들은 어디로 갈까?
일반 소비자가 헌 옷을 처리하는 방식은 주거지 도처에 있는 '의류수거함'에 넣는 것이다. 우리는 의류수거함에 옷을 넣는 행위를 '기부'라 착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옷이 절실하게 필요한 누군가에게로 가서 쓰일 확률은 사실상 매우 낮다. 왜냐하면 수거된 옷들은 다시 입을 수 없는 상태 거나 재사용 가치가 없는 저가 제품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또한 의류수거함은 개인사업자들이 영리 목적으로 설치한 시설이니, 엄밀히 말하면 옷이 필요한 사람에게 기부하는 것이 아니라 헌 옷 수출업자에게 기부하는 셈이다.
의류수거함을 통해 수거된 옷 중 빈티지 의류로 유통되고 재사용되는 것은 단 5%에 불과하다. 나머지 95%는 인도, 방글라데시, 케냐, 가나 등과 같은 개발도상국으로 수출된다. 한국은 미국, 영국, 독일, 중국에 이어 중고 의류 수출 5위에 이른다. 우리나라의 소득 수준과 인구수를 감안해보면 한국인의 옷 사랑, 아니 의류 소비량은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다.
수출된 곳에서도 헌 옷들의 운명은 다르지 않다. 이미 사용가치가 없는 옷들이므로, 현지에서 재사용되는 비율 역시 낮다. 그런데 문제는 개발도상국들은 폐기물 처리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아 헌 옷을 불태우거나 그냥 버리기 때문에 더욱 심각한 환경오염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버린 옷 대부분은 어느 개발도상국으로 보내져 거대한 쓰레기 산을 이루고 있다. 썩지 않는 옷무덤은 토양과 수질을 오염시키고, 소들은 초원에서 풀을 뜯는 대신 버려진 옷을 먹는다.
우리가 무심코 버린 헌 옷들이 누군가의 삶의 터전을 오염시키고 병들게 하고 있다. 그리고 오염된 물과 공기로, 심각한 기후위기로 돌아와 다 함께 대가를 치르고 있다.
모두가 환경문제에 각성하고 있는 현재, 패션산업은 환경오염의 주범으로 손가락질받고 있다. 특히 패스트 패션은 과잉생산을 통해 쓰레기를 만들고 과잉소비를 부추겨 또 쓰레기를 만든다.
그런데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우리 모두 공범이다. 우리 같은 보통의 소비자가 패스트 패션이 고도로 성장할 수 있는 산업 환경을 조성했다고 볼 수도 있다. 새롭고 저렴하고 것에 열광하고, 유행이니까 따라 하고, 단지 기분 전환을 위해 물건을 사는 우리 소비 습관이 패스트 패션의 시대를 만든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