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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월 whalemoon Sep 30. 2021

명절이 싫은 이유

그냥 쉬는 날이면 안 되는 건가?

난 어릴 적부터 명절을 싫어했다.

총 8남매인 아빠는 여섯째였다. 위로 형 4명, 누나 1명, 아래로 남동생 1명, 여동생 1명. 아주 모든 형제자매를 골고루 갖고 있었다.


8남매 중 아빠만 대학을 졸업했다. 어린 시절엔 그게 뿌듯했지만 초등학생이 됐을 무렵만 해도 그게 그다지 좋은 게 아니란 것을 알았다.


명절에 가족이 모이면 고스톱을 치고 술을 한잔하고 즐거운 분위기가 시작된다. 특히 나를 제외하곤 모두 자식이 2명씩 있었기에 고모네 가족이 오지 않아도 명절에 큰집은 늘 사람이 가득했다.


다들 술을 좋아하는 친가였는데, 고스톱이나 윷놀이 등을 하면서 아빠가 돈을 따면 문제가 시작된다. 그래 봤자 점 10원, 점 100원짜리 가족끼리 재미로 하는 게임인데 불구하고 "너는 대학까지 나온 애가 형들 돈 다 가져가면 좋냐?"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한다. 처음엔 웃으며 넘기지만 술이 술을 먹고 게임이 진행될수록 "너 대학 보낸다고 나는 학교도 나오다가 말았어. 넌 대학 나와서 가족들한테 도움이나 줬어?" 같은 소리들이 여지없이 나왔다.


나는 당시 성남에 살고 있었고 아빠는 도로건설일을 하고 있었다. 도로건설의 특성상 아빠가 집에 계속 있는 날은 적었다. 현장의 책임자였기에 아빠 얼굴을 보기는 힘들었다. 주말에 어쩌다가 오게 되면 아빠, 엄마, 나 세 식구의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인천에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 방문하곤 했다. 아빠 나름대로의 감사의 표현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어느 형제자매보다 우리 가족이 가장 많이 조부모 댁을 찾았다.


아빠 형제자매들이 금전적으로 문제가 있을 때 가장 먼저 연락을 받는 것은 아빠였다. 아빠는 있는 돈, 없는 돈까지 끌어모아 돈을 빌려줬고 사촌 언니와 사촌 동생들이 우리 집에서 함께 사는 기간도 꽤나 길었다. 나는 외동이었기에 늘 모든 것을 혼자 누리고 있었지만, 내 방을 내어주게 되고 내 공간을 내어주는 생활이 지속되었다.


9살쯤인가, 아빠와 엄마가 이혼을 했다. 어떤 이유인지 아직도 본질적인 문제는 본인들만 알고 있겠지만 나는 일단 아빠와 함께 살았다. 아빠가 출장이 많았기에 친조부모님이 우리 집으로 와서 함께 살기 시작했다. 보통 할머니 손에서 큰 아이들은 응석을 많이 부린다고들 말을 하기도 하는데, 난 친조부모님이 굉장히 엄했었고 응석 같은 건 생각지도 못했다. 집 안에서 담배를 피우고 레슬링을 보고 두 분이서 화투를 치면서 티격태격 욕설을 뱉기도 했다.


그러다가 명절이 되면 어김없이 큰집에 갔다. 다른 사촌들은 그냥 간단한 심부름을 하고 뛰어노는데, 나는 음식을 해야 했다. 엄마가 없으니 내가 그 몫을 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그놈의 고구마전을 왜 이렇게 만드는 건지 10살 때 고구마전을 2시간쯤 하다가 온 몸에 기름이 튀고 냄새에 질려서 체해버렸다. 결국 음식도 먹지 못했다. 하지만 나에게 돌아오는 얘기는 "몸은 또 왜 이렇게 약해? 지 엄마 닮아서."라는 말이었다. 10살짜리 어린애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그러다가 12살, 여름방학식이 끝나고 나는 가출을 했다. 학교를 가던 가방에 속옷이나 다이어리 등을 넣고 무작정 외가댁에 갔다. "엄마한테 데려다줘."

그 이후로 최근까지 쭉 나는 엄마와 살았다. 내 가출 소식에 아빠는 화가 엄청 나 있었지만 내가 엄마와 살겠다는 강철 같은 다짐이 있었기에 아빠는 결국 내 이야기를 들어줬다. 하지만 명절에는 역시 아빠의 형제들이 있는 곳에 가야만 했다.


가출을 하고 첫 명절, 큰아빠, 큰엄마의 엄청난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도대체 무슨 욕을 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크게 혼이 났다. 하지만 너무나도 익숙했기에 그냥 그러려니 넘어가면서 명절은 나에게 있어서 정말 지옥 같은 날로 기억되기 시작했다. 그냥 두려움과 좋지 않은 느낌들이 고통, 최악 같은 단어로 내 머릿속에 입력이 되기 시작하면서 명절 음식도 싫어하게 되었다. 명절 음식만 보면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오른다. 바구니에 잔뜩 쌓인 전을 보면 체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래서 아직도 기름에 튀겨지거나 하는 그런 음식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게 중고등학생 시절을 보내고 20살, 유학을 다녀왔다. 비자를 변경하려고 한국에 들어왔다가 아빠의 반대로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도 하나뿐인 외동딸이 해외에 나가서 자주 보지 못하는 것도 싫었으리라 생각한다. 내가 성인이 되자 어른들의 모습이 많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들은 나이를 먹어가면서 더 이상 새벽까지 술을 먹지도 않았고, 게임을 즐기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자녀들이 그들의 모습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었다. 아빠가 여섯째다 보니 제일 큰 사촌들과 나의 나이 차이는 꽤나 나기도 했는데 생각해보면 내가 9-10살이던 시절, 그 시절의 어른들의 나이와 비슷했으리라. 결혼을 해서 아기를 낳은 오빠나 언니들도 있었고 그래서 더 이상 명절에 오지 않는 사촌들도 있었다. 그들은 술을 먹고 화를 내고 욕설을 하고 손지검을 하려 했다. 그 대상은 나였다. 내 위로 아무도 대학에 가지 않았다. 가지 않은 건지 가지 못한 건지 그들의 사정이겠지만, 나는 유학을 다녀왔고 심지어 그 유학길에서 대학교 입학 허가증까지 받아서 돌아온 상태였다. 그들이 나에게 화를 내는 이유는 '엄마랑 살면서 아빠 등골을 뽑아서 유학길까지 다녀왔다.'라는 이유였다.


억울했다. 물론 초기 자금은 아빠의 도움으로 정착한 게 맞았지만, 호주에서 유학생활을 하면서 나는 한 달에 70만 원가량의 돈을 지원받았다. 겨우 6개월 정도 있었다. 호주에서 생활하는 동안 셰어하우스에 있었는데 가장 싼 지역의 가장 싼 방을 가도 방값이 70만 원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쌀은 지원을 해줬고, 어린 나이었기에 언니, 오빠들의 예쁨을 많이 받아 밥을 얻어먹는 경우가 허다했다. 친구들의 반찬을 해주고 남은 반찬들로 내 끼니를 때우는 게 대부분이었다. 정확하게 나는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호주에 있었고, 공부에 흥미가 붙어서 직접 영어 등급을 올리고 학교에 서류를 내고 면접을 봐서 내 실력으로 당당하게 합격했었다. 그리고 '학생비자' 변경을 위해 한국에 들어왔다가 아까운 워홀 비자의 기간까지 모두 날려버린 것이었다.


이런 전후 사정을 그들이 알지 못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에게 정당한 이유 없이 쏟아지는 욕설들을 듣고 싶지 않았다. 왜 그다지 사이도 좋아 보이지 않는데, 명절 때만 되면 득달같이 모여서 누군가 공격을 하지 못해 안달인지 이해를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이해를 하고 싶지 않았다. 어른들의 세대에서 공격의 대상이 아빠였기에 지금 우리의 세대에서 그 공격의 대상이 내가 된 것만 같았다. 내 아빠와 엄마를 제외하고도 이혼한 어른들은 많았다. 그 사촌들은 명절이 되어도 잘 오지 않았다. 아마 내가 고생하는 모습을 봤기에, 혹은 그들이 더 현명했기에, 그래서 그 시간, 그 자리에 모이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결국 이러한 명절 사건은 또 다른 사건으로 인해 내가 제일 큰 언니를 고소하고, 그 후에 친할머니의 장례식에서 한번, 다음 명절에 한번 대판으로 싸우고 더 이상 가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난 여전히 명절이 싫다. 더 이상 친가의 명절에 가지 않은 이후 외가의 명절에도 가봤지만 큰 사건들만 다를 뿐, 명절의 본질적인 문제는 늘 같았다.



명절의 문제점은 많다. 아직도 가부장적인 곳이 많아 여자는 음식을 하고 남자는 쉬고 논다. 그렇지 않은 곳도 분명히 있다. 다만 아직도 보편적인 경우의 이야기를 말하고자 한다. 명절마다 꽉 막히는 도로도 싫다. 명절이라 선물을 사야 하고, 용돈을 드리기도 한다. 내가 지금 일하는 회사는 소위 떡값이라 불리는 것을 주지 않기 때문에 내 통장에 들어오는 돈은 늘 같으나, 명절이 있는 달에는 꼭 마이너스가 난다. "용돈이나 선물은 개인의 자유니까, 안 하면 되는 거 아니야?"라고 하지만 그게 쉽지 않다. 음식 하느라 고생한 집에 밥 먹으러 가면서 빈손으로 가는 것은 예의가 아니니까. 그렇다고 아예 가지 않기에는 이미 나를 위한 음식을 하고 있고, 나를 위해 시간을 비워 놓고 있다.


올 추석에 엄마에게 음식을 하지 말라고 했다. 아버지도 아프시고 이사도 해야 하고 비비고 동그랑땡이나 사서 먹고 그냥 맛있는 거 시켜먹자고 했다. 옆사람의 집에도 음식을 하지 말라고 했다. 바람이나 쐬러 나가자고 했다.


몇 년 전 추석에 나와 내 옆사람은 '칭다오'로 여행을 다녀왔다. 하지만 지금은 코로나 상황이라 그러한 여행도 가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번 명절 중 첫 휴일인 일요일에 옆사람의 가족과 계곡에 가서 백숙을 먹고 쉬었고, 다음날인 월요일 저녁에 우리 집에 장어를 포장해가서 먹고 쉬었다. 그리고 다음 명절부터는 그냥 여행을 다니자고 얘기를 했다.


우리 집은 시골로 이사를 가서, 명절에는 차가 막히니 2주 전쯤 가서 고기나 구워 먹고, 옆사람 집도 그전에 가서 맛있는 거 먹고, 명절 연휴 기간에는 여행이나 다니고 집에서 쉬는 것으로 모두 동의를 했다.


명절, 사전적 의미로 '해마다 일정하게 즐기거나 기념하는 때.'라고 나와있다. 과연 무엇을 즐기고 무엇을 기념하는 것일까? 직장인들에게 꿀 같은 연휴에 왜 굳이 평소에는 연락도 잘하지 않는 가족들이 모여서 매번 나이, 애인의 유무 여부, 결혼 여부, 자녀 계획, 연봉, 성적 등 같은 기억 하지도 않을 것들을 묻고 스트레스를 주고받는 걸까? 왜 꽉 막히는 도로 위에서 앞 차의 뒤통수를 보며 이동을 하는 걸까? 왜 쓸데없이 많은 음식을 하고 먹지도 않을 음식들을 싸주고 음식 하느라 스트레스를 받고 하는 걸까? 아침 차리고 설거지하면 점심 차리고 설거지하면 저녁 차리고 이런 무의미한 짓을 뭐하러 하는 걸까?


앞으로 명절이라는 단어 말고, 그냥 휴일이라는 단어로 바뀌었으면 좋겠다. 그 의미도 그렇게 바뀌었으면 좋겠다. 음력 1월 1일, 8월 15일 이렇게 말고 그냥 2월 첫째 주 월-수, 9월 셋째 주 월-수, 이런 식으로 쉬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다.


더 이상 대가족의 모습을 찾아보기도 힘들고, 각자 하루하루 본인의 삶을 챙기기도 힘든 지금. 고리타분한 명절의 방식이 바뀌기를 바란다. 나는 명절이 싫었고, 명절이 싫고, 앞으로도 명절이 싫을 것이다. 명절은 나에게 그냥 휴가이기를 바란다.



이미지 제공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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