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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월 whalemoon Mar 08. 2021

죽음으로 시작해 소송까지 지나간 최악의 2020년.

다신 없을 최악의 해라고 생각했다.

32살이던 2020년.

난 최악의 해를 보냈다.


코로나로 시작된 2020년.

난데없는 바이러스로 인해 세상이 어수선했다.


1월 말, 나는 새 회사에 입사를 했고 열심히 적응 중이었다.

컴퓨터 앞에 앉아 영상을 편집하고 글을 쓰고 포토샵을 만지작거리던 그 날,

할아버지의 임종 소식을 들었다.


엄마의 아빠인 나의 할아버지는 나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해주던 사람이었다.

다른 친척들의 질투를 받을 정도로 나에게 사랑을 주던 사람이었다.


2019년 정도부터 할아버지의 치매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밤이고 새벽이고 할 것 없이 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부름에 응답했다.

점점 기력을 잃어가고 할머니마저 골절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자 할아버지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모시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다짐했던 요양원에 모시게 됐다.


주에 한 번 정도, 바쁠 때는 달에 두세 번 정도 할아버지를 찾아갔지만

2020년 코로나를 시작으로 할아버지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들었다.

기저질환자가 많은 요양원과 요양병원에서는 면회가 어려웠고,

치매로 인해 거칠어진 성격의 할아버지를 보는 게 너무나 가슴 아팠기에 난 할아버지를 보는 것이 더 힘들어졌다.


그러던 2월의 어느 날,

아침 10시쯤 울리는 엄마의 전화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고 역시 예상했던 대로 할아버지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아직은 어색하던 회사 대표님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을 얘기한 뒤 급하게 택시를 잡아타고 할아버지가 있던 요양병원으로 향했다.


이미 그 전에도 숨을 잘 못 쉰다거나 식사를 삼키시지 못하는 등의 증상이 나타났기에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죽음은 날 무너뜨리게 만들 정도의 큰 일이었다.


3일간의 장례식 내내, 나는 모든 걸 맡아서 일을 했다. 부족한 음식을 주문하고 조문객을 받고 그 외 이것저것 모두 맡아서 했다. 왜 내가 맡아서 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하는 것에 대해 나는 당연하게 생각했다. 잠을 전혀 자지 못한 탓에 몸과 정신이 힘들었지만 그래도 해야만 했다. 장례식이 다 끝난 후 친척 중 몇 명의 입에서 '네가 가장 사랑을 많이 받았으니 네가 해야지.'라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 당연히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장례식 이후 난 많이 아팠고 힘들었지만 1년이 지난 지금도 그 슬픔을 다 쏟아낼 만큼 충분하게 울지 못했다.


일이 바쁘다 보니 괜찮아지는 것 같다가도, 빈 시간이 생기면 다시 흉포한 부재의 외로움에 휩싸였다.

그래서 더욱 바쁘게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전에 일했던 직장에서 당한 사기로 인해 새벽에 세무직원이 초인종을 눌렀고,

가전제품들에 노란색 압류딱지를 붙였다.


IMF 시절 집에 붙었던 압류딱지와는 크기부터 부착력 차이까지

그리고 내가 느끼는 압박감마저 크게 달랐다.


정말 정신을 차릴 틈이 없이 쏟아지는 나쁜 소식에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

소송을 진행하기로 마음을 먹고 자료들을 수집하고 변호사를 만나고 가해자에게 전화를 하고 술을 먹으면서 하루하루를 버텼다.


몇 년 전, 엄마가 거대 세포종이라는 병으로 수술을 했었다. 폐로 전이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검사를 받아야 했고 그 검사에서 폐로 전이한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정밀 검사를 하고 그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일주일 동안 괜찮기만을 바라며 믿는 신도 없으면서 기도를 했다.


그쯤 아버지가 아팠다. 올해 초부터 신장이 조금 안 좋으셨는데 얼굴에 황달기도 심하고 소화도 잘 못하셨다. 병원에 모시고 가야 했지만 엄마의 검사 결과를 듣는 날이었다.


다행히 엄마는 아무 일도 없었다. 일주일간 조마조마했던 마음이 확 풀어지면서 눈물이 났다. 아버지 병원으로 곧장 달려갔는데, 아버지가 암인 것 같다는 진단을 받았다고 하셨다. 그것도 완치될 확률이 아주 낮은 담도암.


어쩌면 이렇게 계속해서 쏟아져 나올까 싶을 만큼 일들이 계속 터졌다.

지금은 수술을 잘 마치고 항암치료를 받고 계신다. 초기에 발견이 잘 안 되는 병인데 운 좋겠도 초기에 발견을 해서 정말 다행스럽게도 건강해지고 계신다.


코로나로 인해 아버지 병원을 예약하는 것부터 수술 날짜를 잡는 것도 너무 힘들었고 신생아와 어린이를 돌보아야 하는 언니, 회사 일이 바쁜 동생을 대신해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나의 몫이 된 그 일들도 나는 굳건하게 처리했다.


애초부터 예민하게 태어난 나는 신경 쓰는 일들이 많아지자 몸이 고장 나기 시작했다. 아무리 먹어도 살은 계속 빠지고 불면증과 공황장애도 심해졌다. 어떻게 출근해서 일을 하고 집에 오는지 조차 기억하기 힘들 정도였다. 내가 열심히 사는 이유 중 하나인 우리 멍멍이들이 갑자기 아파서 수술도 여러 차례 진행했다. 계속해서 고통의 연속이었고 그러다 보니 나는 오히려 담담해지기 시작했다.


괜찮아졌다기보다 웬만한 일에 상처를 받지 않기 시작했다. 아니 상처를 받아도 내색하지 않게 되었다. 모르고 매매한 집이 불법 건축물이었고, 사이가 좋지 않은 이웃의 신고로 벌금을 내야 하는 상황에도 닥쳤다.


이렇게 나열을 하면서도 난 대체 어떻게 2020년을 버텨왔나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최악의 해였다. 내 이야기를 듣던 정신과 의사 선생님도 어떻게 버티냐고 물어봤다. 나도 모르겠다.


그렇게 2021년을 맞이했고, 다니던 회사를 관둬서 돈이 나올 구멍도 없지만 지금은 하나씩 해결이 되어가는 느낌이다. 당장 건강보험을 내야 할 돈도 없고, 사기건으로 인해 카드도 정지당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2020년보다 훨씬 나은 한 해를 보내고 있다. 2021년은 분명히 괜찮은 해가 될 거라고 믿는다.


며칠 전, 인스타그램의 게시물들을 정리하다가 한 해의 마무리 글들을 봤는데 내 모든 해는 다 최악이었다고 적혀있었다. 인스타그램을 시작한 2014년부터 2020년까지 모두 '올해는 최악이었다.'라고 적었다. 그러나 왜 최악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나는 한 해를 마무리할 때마다 긍정적인 기억보다 부정적인 기억이 많아서였겠지만 그 부정적인 기억들이 사건들이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2020년도 나에게 어떤 이유로 최악의 해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시기가 올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2021년을 살아가고 있고,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올해도 사실 평탄치만은 않은 한 해가 될 것은 분명하지만 그래도 올해의 마지막엔 '괜찮은 2021년이었어.'라고 말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런 한 해를 만들기 위해 나는 오늘을 열심히 살 예정이다.


난 비교적 괜찮은 어제를 보냈고, 좋아하는 영화를 보며 오늘을 보내고 있고 저녁에 먹을 맛있는 고기를 생각하며 행복해하고 있다. 내일 기억하는 오늘은 행복한 날이 될 것이고 그 행복한 날들이 쌓여서 행복한 2021년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토닥토닥, 오늘도 수고 많았어. 남은 오늘도 잘 보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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