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팔트 바닥을 배경으로 가느다란 줄기에 몸을 지탱한 민들레를 볼 때면 이런 생각을 한다.
'너 정말 대단하다.'
'삭막한 도시 사이를 비집고 어떻게 이렇게 굳건히 피어날 수 있니?'
'힘겹게 피어난 꽃이니 더 오래오래 살아남길 바라.'
푸릇푸릇 초록색이 가득한 이파리들 사이로 피어난 민들레를 볼 때면 이런 생각을 한다.
'어머 너무 예쁘다!'
'초록색 사이로 노란색이 드문드문 있으니 더 아름다워 보이는 거 같기도?'
'민들레 때문에 배경이 되어버린 초록색 이파리들아, 너희도 소중한 존재야!'
저마다 형형색색의 빛을 지닌 꽃들 사이로 피어난 민들레를 볼 때면 이런 생각을 한다.
'쟤는 무슨 꽃이지?'
'우와! 이 꽃 되게 예쁘게 생겼다!'
'민들레는 어딜 가나 있네.'
우리 곁에 쉬이 찾아볼 수 있는 민들레를 본 나의 감상평이다.
분명 같은 꽃인데 어디에 피어있느냐에 따라 민들레를 향한 나의 목소리는 변질된다.
아스팔트에 있을 때는 괜히 줄기가 가냘파 보이고, 꽃은 생명력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작은 틈 사이에서도 본인을 드러내는 민들레가 가끔은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풀 사이로 있는 민들레는 노랗게 피어있는 꽃이 어여쁘게 보인다.
네가 네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곳에 잘 있구나 싶어, 예쁘다는 감탄사를 남발한다.
그러다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던 풀잎들에게 눈이 가고, 너희가 있어 꽃이 빛나는 것임을 이야기한다.
존재해 주어 고맙다는 말과 함께.
다른 꽃과 함께 존재하는 민들레를 볼 때는 네가 있는 건 당연하다는 듯 스쳐 지나간다.
그간 보지 못했던 혹은 잘 볼 수 없었던 꽃들에 시선이 꽂히고 미소를 머금으며 바라본다.
너희는 어디에 있다가 이제 나타났냐며 소중하고 예쁜 말들을 내뱉는다.
나는 사람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내가 어디에 존재하느냐에 따라, 프레임은 바뀌기 마련이다.
학창 시절 반 1등을 밥먹듯이 하던 학생은 그 반에서는 빛날 수 있어도, 전국을 놓고 보면 하염없이 부족해 보일 수 있다.
이는 마치 민들레가 이파리와 있을 때와 다른 꽃들과 함께 있을 때의 상황 차이와 같다.
회사에서 큰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던 사람은 사업을 했을 때 멋진 쾌거를 이뤄낼 수 있다.
이는 삭막한 도시에서 아등바등 살아내 보려 했던 민들레보다 자신이 홀로 존재했을 때 빛나는 것과 같다.
물론 전국 1등이 아닌 반 1등이 부족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회사에서 큰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다고 가치 없다는 말이 아니다.
내가 빛날 수 있는 곳, 그곳에 있어야 행복하다고 말하고 싶은 거다.
사람은 평생 남의 평가를 의식하며 살아간다.
단 1%만이 그 평가를 신경 쓰지 않고 살아간다.
신경 쓰지 않는 1%가 될 수 없다면, 평가를 잘 받을 수 있는 곳을 찾아가야 한다.
내가 돋보일 수 있는 곳은 분명 어딘가에 있다.
'나는 평범한 사람이야.'
'나는 저 사람처럼 빛날 수 없어.'
'나는 부족해.'
라는 생각으로 두 어깨를 축- 늘어트리지 말고, 두 눈을 크게 뜨고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찾는 과정이 필요하다.
나는 그 과정을 걷고 있다.
내게 뛰어난 게 무엇인지 아직도 알 수 없고,
나는 지극히 평범하며,
늘 부족하다는 말을 달고 살지만
그럼에도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은 반드시 있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분명 어딘가에서 빛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게 내 존재의 이유일 것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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