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기관 출근 100째, 나 아직도 ‘척’하고 있다!
뭔가 굉장히 바쁜척. 사실은 짤 찾으면서 눈치보는 중
출근한 지 12주차.
나름 적응한 듯 하지만 사실 나는 모든것을 '척' 하는 중이다.
피곤하지 않은 척.
바쁜 척.
업무가 있는 척.
업무를 하는 척.
받은 업무를 이해한 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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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너는 니 할일을 모르냐, 할 일은 알아서 찾아서 하는거다! 라고 누군가는 말하겠지만 글쎄...
이곳은 다르다.
내가 속해있는 부서의 인턴이 하는 업무는 크게 3가지.
먼저, 행정보조업무이다. 문제는 외교부산하 공공기관에서 일하기에 나의 상상처럼 할 수 있는게 많지도 않다. 일단 보안의 이유로 접근할 수 있는 자료도 한정적이고 내가 사업을 기획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당연히 할일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두 번째로, 모니터링. 해외 공무원들이나 정책입안자들을 국내에 초청해 연수를 진행하는 사업에 모니터링을 나가서 해당 사업이 계획대로 잘 진행되는지, 어떻게 사람들이 참여하는지, 해당 국가의 상황은 어떻게 흘러가는지 등등을 배울 수 있는 업무이다. 그리고 실제 모니터링을 나가는 출장업무가 이제 슬슬 생기고 있는데 이게 환상처럼 아름답기만하지는 않다.
일단 다른 지역 혹은 다른 기관으로 출장을 가야하는 것 자체도 익숙하지 않다. 그리고 출장 계획과 관련해서 보고서도 올려야하고, 다녀와야하고. 다녀와서도 기한에 맞춰서 보고서를 넣어야하는데 지난 회차에서 언급했듯이 경험이 부족한 상황인 나에게는 단순 출장 보고서를 쓰는 것 조차 굉장히 어려워 여러번 피드백을 받고 그 이상으로 여러번 고쳐야만했다.
익숙하지 않아서, 미숙해서 생기는 실수들과 어려움이겠지만 환상과는 다른 어려움이 때로는 전적으로 나의 부족같이 느껴져서 버거울 때가 있다.
이렇게 “나만 모르는 건 아닐까? 왜 나만 부족하지?”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올 때, 손은 괜히 메모하는 척, 공부하는 척 바쁘게 움직인다. 집중하는 척, 이해하는 척. 그러다 보면 정말 이해하게 될까? 매일이 그렇게 돌아간다.
공무적인 일상에서 '창의성'은 낯설다
세 번째로 인턴들이 담당하는 업무는 홍보 콘텐츠 제작.
사실 그동안 소규모 스타트업 NGO에서의 인턴십과 호텔에서의 인턴십을 경험한 나에게 공공기관이라는 조직은 안정적이고, 체계적이고, 많은 걸 배울 수 있는 곳이다.
그런데 나는 가끔 너무 체계적이어서 숨이 막혔다. 정답이 있는 일.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한 일. 어떤 일을 해도, 결과보다 '양식'이 더 중요할 때가 있다.
광고홍보학과를 전공한 나로서는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아이디어를 나누고, 어떻게든 남들보다 하나라도 튀고, 한 가지 요소라도 더 참신하게 만들어서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콘텐츠를 만드는 것이 익숙하다. 하지만 기획안을 제출했을 때 “이거는 공공기관 특성상 불가능해요.”라는 말에 멈칫하게 된다.
그렇게 이 흐름에 내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인 걸까. 생각이 많아지는 날이 늘어갔다.
사실 적응이라는 건, 거창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조금씩, 아주 조금씩 익숙해졌다. 메신저의 말투도, 결재 프로세스도, 누가 어떤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도.
보고서도 더 빨리 쓸 수 있게 되었고, 아침마다 복사기를 두 번만 욕하고 켜도 되었다. 아직 좋아하는 일은 아니지만, 덜 힘들어진 건 맞았다. 그게 적응의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
4. 그리고 나는 시도했다. 나를 위한 것들
그래서 동시에 바깥세상에도 눈을 돌렸다. 하고 싶은 걸 해보고 싶었다. 외국계 광고대행사에 지원서를 넣었다. 떨어졌지만, 자소서를 쓰는 내내 내 안에 있던 '하고 싶은 일'이 명확해졌다.
개발협력 관련 자격증도 따고, 쉬는 날엔 외국인 친구랑 도시 곳곳을 돌아다녔다. 학교 후배랑 얘기하다 보니 요즘 취업시장의 냉정함이 조금은 덜 외롭게 느껴졌다. 대학원 다니는 친구 얘길 들으면서 삶의 방식이 얼마나 다양한지도 알게 됐다.
5. 지금 나는, 진짜가 되는 중일지도 모른다
‘척’은 언젠가 진짜가 되기도 한다고 했다. 일하는 척, 아는 척, 해내는 척.
어쩌면 그 척들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걸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은 그 척들이 하나씩 진짜로 바뀌어가고 있는 중이다.
성장은 대단한 성취가 아니라, 오늘 하루도 버틴 나를 다독이는 데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오늘도, 나는 내 자리에서 버틴다.
버티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