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성격

by 초동급부
오늘은 금요일이지만 내일 이 편지를 읽을 때쯤이면 아마 휴가 나와서가 아닐까 싶어.
넌 분명히 내일 휴가를 나올 테고 난 틀림없이 너한테 편지를 줄 테니깐... 항상 미심쩍었었어. 첫 특박 때도 난 전혀 생각 못했었고, 두 번째 특박 때는 추석날 나오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안 나오길래 11월이나 되어야 나오는 줄 알았구. 세 번째 특박은 기다리다 지쳐서 네가 12월 28일에 나온다고 했어도 솔직히 반신반의했었어.

근데 내일은 우리 보는 거 분명한 건지?
항상 생각지도 못하게 너를 만났지만 내일은 분명한 거지? 그래서 그런지 왠지 잠도 안 오고 그렇다. 어린아이 같지? 소풍 가기 전날 잠 안 오는 것처럼 말야. 너두 그랬겠다. 오늘 특박 나올 거 생각하고 기분 좋았겠네. 뭐, 은경이 땜에 기분 좋은 건 아니었겠지만.

그래두 잠은 좀 많이 자 둬야 너 만나서 하품도 안 하고 졸지도 않지. 그러고 보면 전화로는 매일 존다고 구박하면서 만나면서는 한 번도 그런 적 없었던 것 같다. 그치? 언제쯤이면 널 만나서 또이또한 내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 항상 눈은 졸린 것처럼 반쯤 감겨있고 5분이 멀다 하고 하는 하품. 영락없이 네 어깨에 기대어 졸기만 바라는 내 맘... 두렵다. 이런 나를 네가 또 언제 구박할는지... 불쌍하다. 생각해 보니까 내가 말야.

삼철아!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지만은 왠지 해서는 안될 것 같은 말 들 뿐이야.
이런 얘기 안 하는 것만 못 하다는 거 알면서 내가 진정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어.
너, 그랬지. 너는 널 잘 안다고. 네가 참 부럽다. 나는 나를 잘 모르겠거든. 항상 뭐 하나 딱 부러지게 하는 것도 없고 내가 바라는 것조차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는 내 모습이 싫다. 어쩌면 너무도 잘 알지만 전혀 내색할 수 없는 나인지도 몰라. 그럼 이중성격이겠지?

여하튼 난 나한테 열 번의 같은 질문을 해두 2번두 같은 해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거야. 열 번 모두가 틀리다는 거지...
잘 지내다 들어가고 , 못 보더라도 조심해서 들어가.

1999. 1. 22.


편지 속 바람대로 내게 직접 전한 것이 틀림없다.

12월 30일의 슬픈 배웅 이후에 3주가량의 시간이 지난 이 편지에는 소인이 찍혀있지 않다. 그때는 아버지의 회갑이었다. 공식적으로 특별 외출이 허락된 것인지 특박 주기를 조정해 준 것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독특하고 귀여운(?) 빠마머리 그녀의 참석만 선명하다.


기다림이 절반으로 줄어든 기쁨과 기대가 묻어 있는 글들, 그 마음으로 잠도 오지 않는다는 그녀의 편지는 잘 지내다 들어가고, 못 보더라도 조심해서 들어가라는 말로 끝을 맺는다. 소풍을 기다리는 은경 어린이가 나의 이름을 부르며 제이슨 본으로 변한 듯... (제이슨 본은 영화 '아이덴티니' 주인공)

중반 이후의 내용으로 자꾸 '이중성격' 이라는 말만 뇌리에 둥둥 떠 다닌다.


때로는 그대가

불행한 운명을 타고났으면 합니다.

모자랄 것 없는 그대 곁에서

너무도 작아 보이는 나이기에

함부로 내 사람이 되길 원할 수 없었고

너무도 멀리 있는 느낌이 들었기에

한 걸음 다가가야 할 때 두 걸음 망설여야 했습니다.


때로는 내가

그대와 동성이기를 바라곤 합니다.

사랑의 시간이 지난 후

친구도 어려운 이성보다는

가끔은 힘들겠지만

그대의 사랑얘기 들어가며

영원히 지켜봐 줄 수 있는

부담없는 동성이기를 바라곤 합니다.

- 원태연 시집 中


편지에 이어 그녀가 적어 준 시이다. 이 좋은 시까지...

이중? 불행한 운명?? 동성???


낯설지 않은 그녀의 이런 표현들을 당시의 내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많은 편지, 말과 행동의 배경을 이해하고 그녀의 상처, 감정 그리고 그 마음을 공유하고 있다.


처음에는 나의 사랑이 커서 그럴 수 있다고만 자찬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그럴 수 있도록 나를 먼저 더 많이 사랑해준 아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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