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수 있어요?

by 초동급부
삼철이에게...

잘 지냈어? 예전보다 전화통화도 자주 하고 그러지만 그래도 늘 걱정되고 궁금하고 그래.
잘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네 목소리 들으면 힘들지나 않을까 걱정도 되고. 은경이가 삼철이 걱정 많이 하고 네 생각도 많이 하는 거 알지? 네가 나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안다고 생각하면 내가 모든 걸 말해 주지 않아도 때로는 너를 애태우게 만들어도 그렇게 걱정할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너두 예전에 알았으리라 생각해.

단지 내가 걱정되는 건 어떤 얘기를 하던 간에 넌 그 일과 연관 지어 생각하겠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깨끗이 없었던 일처럼 잊어버릴 수 없는 거지만 그렇지만 난 네가 아니 우리가 그 일을 없었던 것처럼이라도 생각했으면 좋겠어. 너나 나나 그게 잘 안될 거라는 거 알아.
하지만,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기든 그 일과 연관 지어 생각하진 않았으면 좋겠다. 정작 너한테는 이렇게 말하지만 나 또한 그렇게 쉽게 생각되어지지 않는 건 사실이니깐. 이젠 네가 날 좋다고 말해도 그일 때문에 그러는 건 아닌지...

나 너한테 정말 솔직한 내 맘을 털어놓고 싶어. 하지만 편지로 얘기하기엔 정리도 잘 안되고 내 맘을 잘 전달할 수 없을 거 같애. 그렇다고 널 떠난다거나 헤어지자거나 그런 얘긴 아니구... 그냥...
다음에 너 휴가 나오면 그때 얘기하지 뭐. 그때까지 잊어버리지 않는다면 말야.

오늘 일요일인데 뭐 했어?
난 어제저녁에 비디오 한 편 보고 좀 늦게 잤거든. 그래서 좀 늦게 일어나구 좀 늦게 아침밥을 먹구... 그랬다. 예전부터 너 보고 내가 보자구 했던 영화 있지. '찜' 그거 봤어. 난 재미만 있던데, 가만 생각해 보니까 너랑 그거 봤으면 너한테 쿠사리 먹었을 거 같더라. 남자들은 드라마 같은 거 싫어하잖아. 그래두 봤으면 참 재미있었을 텐데.

내용은 대충 알지?
안재욱과 김혜수 나오고 안재욱이 친구의 누나를 사랑하잖아. 그게 바로 김혜수고. 우여곡절 끝에 여장을 해서 김혜수랑 친구가 되고 뭐 그런. 근데 그 영화 보면서 세상에 저런 남자도 있구나 했지. 왜 남자들은 입으로는 사랑한다 하면서 정작 정말 그런 사람은 별루 없잖아.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고...
근데 영화라서 그런지 안재욱 정말 멋있게 나오던데. 평생 한 여자만을 사랑하고 그 여자만을 위해서 살거래. 난 어디 그런 남자 없나? 이젠 너한테 그런 남자 있으면 소개시켜달란 말도 못 하겠고...

예전부터 그랬지만 혼자 평생을 살아야겠군.
이제와 체념할려니 새삼스레 가슴이 아픈걸. 장난이야. 난 혼자 살 운명인가 봐. 것두 나쁘지 않은 거 같구. 그치? 나만 혼자 살면 심심하니깐 너두 좋은 여자 못 만나면 혼자 살아라. 솔직히 너 결혼하면 암만 친구래도 만나기 힘들 거 아냐. 웃긴다 나도 참. 그렇다고 네가 나 땜에 결혼을 안 하진 않을 텐데.

날씨가 또 추워진대. 뒤늦은 추위에 감기 조심하구 항상 몸 건강하구.
밥맛 없어도 밥 많이 먹어야 돼? 그래야 무슨 일이든 버틸 수 있는 거야.

1999. 1. 31.


지난 편의 편지를 만나서 직접 받은 날짜는 1999년 1월 23일로 보인다.

이후 비교적 긴 시간이 흐른 뒤인 1월 30일에 다음 편지가 왔다. 그리고 오늘이다. 서로가 그토록 원했던 만남의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 수 없고, 다른 복귀 때와 같은 배웅도 없었던 것 같다.


30일의 편지는 어떤 일로 인해, 시간이 얼마나 지나야 나를 편하게 대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자신에 대한 염려를 접어두고 너무 많이 걱정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이어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중의 승리와 패배에 관한 이야기, 루터의 인내에 관한 짧은 글귀 그리고 만해 한용운 시인의 '알 수 없어요'라는 시가 적혀 있다.


오늘의 편지에도 그 일은 자주 등장한다.

어떤 얘기를 하든 간에 그 일과 연관 지어 생각할 수 있는 작지 않은 일, 깨끗이 없었던 일처럼 잊어버릴 수는 없지만 안 되겠지만,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생각하고 싶은 일 그리고 두 사람의 앞 날에도 지속적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는... 일... 그 그일...


우리 둘 사이에 어떤 사건이 일어난 것일까?



주말에 그녀가 본 비디오 속 '평생 한 여자만을 사랑하고 그 여자만을 위해서 살 거라는 남자'.

영화 주인공 같은 그런 남자를 갈망하던 1999년의 그녀, 적어도 지금까지는 못지않게 평생 한 여자만을 사랑하고 그 여자만을 위해 살고 있는 남주 아닌 남편과 살고 있다.


'찜' 마치 현실이 된 것 같은 그 영화, 제목이 참으로 의미심장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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