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들

by 초동급부
삼철에게...

요즘 많이 힘들댔지?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 영향이 너한테까지 가게 되었는 진 모르지만 암튼 이번 일 그냥 잘 넘겼으면 좋겠다. 네 목소리 들으니깐 내 생각엔 넌 별루 심각하지 않은 거 같기도 하던데.

오늘 우리 전회 꽤 오래 했지? 한 30분 했나?
오래 하는 것도 좋지만 난 매일 네 목소리 들었으면 더 좋겠는데. 하루에 1분이라도 좋으니깐 네 안부만이라도 물었으면 좋겠다. 아냐, 근데 넌 일부러 전화하러 나오지 않을 거 같애. 꼭 누가 심부름을 시켜야지만 나오잖아. 안 그러면 일주일에 한 번 통화하기도 힘들걸. 예전보다 나아지긴 했지만, 사람이다 보니까 바라게 되는 것도 더 많구. 자꾸 욕심이 생기고 그렇네. 그전에 너 훈련소에 있을 때는 첫 특박 나오기 전까지 너 잘 있는지 조차 몰랐는데.

떠나기 며칠 전 네가 내게 불러주었던 노래 몇 곡과 너의 메시지를 근 한 달이 넘도록 저장시켜 놓고 매일 들었던 거 너 아니? 내게 휴대폰이 생기기 전까지 그랬어. 네가 남겨준 음성 메시지를 네 목소리 듣고 싶을 때마다 들었는데... 지금도 물론 너와 가끔 통화할 수 있고 네 목소리 들을 수 있어서 좋긴 한데, 너한테서 며칠이구 연락 없을 땐 네 목소리 듣고 싶어도 들을 게 없다는 게 참 섭섭하드라구. 하나를 얻으면 또 하나를 잃게 마련인가 봐. 그래도 가끔 통화라도 할 수 있는 게 어딘데, 너두 그렇게 생각하지?

오늘은 너랑 통화를 길게 해서 그런지 네가 꼭 서울에 있는 거 같았다.
전화 끊고 당장이라도 서강대교 넘어서 너희 동네로 달려가면 예전처럼 그곳에 네가 서 있을 것만 같은 착각이 자꾸 들었어. 사람 일이란 게 알 수 없어서 그런지 제대 후에 과연 우리가 변하지 않을 수 있을까 궁금해. 과연 그땐 우린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혹시나 서로 미워하고 보기 싫은 사이로 되어 버리면 어쩌나 싶기도 하고. 벌써부터 2년 후의 일을 걱정하다니.

어디선가 이런 얘길 들었어. 인연은 따로 있는 거래.
그래서 둘이 아무리 사랑하고 좋아하고 그래도 인연이 아니면 헤어지는 거고 또 인연이라면 둘 사이를 갈라놓고 훼방 놓고 못 만나게 해두 결국은 만나는 거래. 만나야 할 사람은 언젠가 꼭 다시 만나게 된데. 이런 말들이 정말 맞을까? 다는 믿지 않지만 어느 정도 맞는 구석이 있는 거 같애.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인연일까? 정말 평생 같이 할 수 있는 인연일까? 아니면... 궁금하지 않니? 우리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서로를 위해 살아가게 될지 말야. 난 참 궁금해 너는?

너 지금 뭐 하고 있어? 지금은 2월 8일 토요일 밤 11시 45분인데, 지금 자고 있어?
그냥 궁금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하게 주어진 같은 시간들, 똑같은 시간에 넌 과연 뭘 할까? 난 너두 알다시피 네 생각하면서 편지 쓰고 있지. 요금은 꿈도 잘 안 맞는 거 같애. 역시 개꿈 인가 봐. 거의 매일 난 네 꿈꾸는데 네게서 전화는 잘해야 일주일에 한두 번 오잖아. 근데 꿈을 꾸어도 어떤 내용인지 생각 잘 안나. 그저 어렴풋이 너였다는 거만 알 수가 있지. 이상하게 꼭 네 꿈을 꾸고 나면 가슴이 철렁해. 가슴이 뻥 뚫려서 그 사이로 바람이 막 새들어 와서 엄청 시린 거 같은 기분 알어? 너 가슴이 시린 게 어떤 기분인지 아니? 바로 그런 기분이야. 말로 표현할 수 없이 묘한 기분...

이젠 정말 겨울이 얼른 갔으면 좋겠다.
입춘도 지났는데 이젠 그렇게 안 춥겠지? 하긴 봄도 싫은데 나는. 어서 여름이 왔으면 좋겠다.
그럼 몸 건강히 잘 지내구 있어. 또 편지 쓸게.

1999. 2. 6.


'이때 나는 어떤 느낌으로 또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내의 편지를 다시 읽고 또 쓰는 일을 하면서 속으로 이런 질문을 자주 해본다. 물론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아내의 간절한 마음을 다는 느끼지 못했고 그 깊은 생각들을 모두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정확히 기억하는 감상은 있다. '내가 뭐라고...' 그녀가 보내 준 편지나 선물들을 받으면서 자주 혼자 중얼거리기도 했던 말이다.


자기중심적인 인간이기에 나의 시간과 상황에 함몰되어 온전히 느끼지 못했을 뿐 아니라 무엇이든 항상 나중으로 미루곤 했다. 입대 직후에도 제대 직전에도 그것은 다르지 않았다. 2년 후에 우리는 어떤 사이일지 우리가 진정 인연인지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도 역시 그랬다.


27년이 지난 지금 아내가 했던 질문들에 대한 답은 이미 나와 있다.

서로가 힘겹던 시기가 없지는 않았으나 우리는 변하지 않았고 크게 달라지지도 않았다.

또한, 우리는 평생을 함께할 부부의 인연이었다.


내 꿈을 꾸고 나면 '이상하게 가슴이 철렁하고 뻥 뚫려서 그 사이로 바람이 막 새들어 와서 엄청 시린 거 같은 기분을 이때 알았는지는 모르겠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묘한 그 기분...

나의 정서로는 매우 낯설지만 객관적으로 전혀 낯설 것이 없는 중년이 되고 한 여자의 남편, 한 아이의 아빠가 된 지금은 그 기분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발행의 압박과 함께 다가온 새벽 빗소리에 눈을 떠 거실 창문을 열었다.

만물이 내는 청량한 파동과 함께 신선한 기류도 함께 흘러 들어온다. 노트북을 꺼내 키보드에 얹고 있는 손 위 한쪽 어깨가 가끔 시리기까지 하다. 침실에 잠들어 있는 아내와 아이를 생각하면 아무런 예고도 규칙성도 없이 불쑥 가슴 한켠에 오늘과 같은 어깨의 감각이 느껴질 때가 있다.


이것으로 아내의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도 되었으리라.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