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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동급부 May 01. 2024

신문에서 보았소!


1979년 10월 이 나라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있을 법한 이 즈음에 나는 만 2살 6개월 정도였다. 온 국민과 국토를 흔들었던 큰 사건이 터진 그때 아버지의 큰 누나이신 고모가 우리 집에 잠시 머무셨는데, 아침에 토방에 서서 마당에 놀고 있는 내게 불쑥 물었다.

(난 이 장면들을 진짜 다 기억하고 있다. 진짜다.)


고모: “삼철아~ 박정희 대통령을 누가 죽였니?”  
나: 김재규가 죽였어라우.”
고모: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나: “봤으니께 알지라우”
고모: “네가 진짜 봤어? 어디서 봐?”
나: “신문에서 봤지라우, 유신의 심장을 쐈다 안혀요~”
고모: ㅎㅎㅎ


이후에 큰고모가 아버지께 글도 모르는 녀석이 신문에서 봤다며 눈을 똑바로 뜨고 당당하게 말하더라고, 이 놈이 앞으로 분명 큰 인물이 될 거라고 하셨단다. 이 이야기는 아버지로부터 귀가 체하도록 들었다. 또 이 얘기를 하실 때마다 아버지는 항상 즐거우셨다. 나도 내가 큰 인물이 될 줄 알았다.


난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TV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하늘이 무너진 것인 양 통곡을 했다. 주로 여성들이 많았는데 가끔 동네에 장례가 있을 때 보는 누런 상복을 입고 머리에 새끼줄을 맨 아줌마도 있었다. 온통 꽃이 붙어있는 버스를 봤던 기억도 있다. 이 얘기가 나오면 난 항상 일관되게 진술하나 주변인들 역시 일관되게 ‘그짓말~’ 이라고 한다. 만 세 살도 안된 기억을 성인이 된 이후까지 간직하고 있기가 어렵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겠으나, 특별한 기억이라면 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말입니다.

한번 더 생각해 보면 고모가 왜 그런 예언을 하셨는지 명확하지 않다. 난 그것이 알고 싶어 조목조목 되짚어 본 적이 있다.

① 아주 어린아이가 시해 사실을 알고 김재규라는 이름을 안다? 온 나라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② 신문이라는 출처를 제시하고 마치 직접 목격한 것 인양 우겼다? 모른다 하기 싫어 한 답이니 뭐든 대야지.

③ 글도 모르는 애가 유신의 심장을 쐈다는 발언을 인용해 신뢰도를 높이려 했다? 매체를 켜기만 하면 나오는 말이었다. 또한, 우리집은 자랑스러운 동네 유일의 텔레비전보유가였다.

④ 연세 많으신 어른이자 큰 고모에게 눈을 똑바로 뜨고 당당하게 말한 태도? 빙고!


모른다고 하기 싫어서 신문을 근거로 제시하며 자신 있게 말하는 어린아이의 당찬 모습이 그 분의 예언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었다. 이후에도 난 당차고 똘똘한 아이로 통했다. 예언이 아이의 능력이 아니고 자세를 핵심으로 했던 것처럼 말이다.


40년 이상 지난 지금 난 큰 인물이 되지 못했다. 일단, 난 키가 작다.

큰 인물의 명확한 정의에 대한 전제는 필요하겠으나 어느 기준으로 봐도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녀의 예측은 빗나갔다.


부모님의 기대가 컸었던 만큼 실망도 컸을 것이다.

내게도 꼭 이루고 싶은, 적어도 사회적으로 지금보다는 나은 지위에 오르고자 했던 꿈은 있었다. 이는 아버지의 꿈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토록 바라던 막내아들이 큰 인물 되는 아버지 그것,  나와 공통의 그것을 실현 수 없게 된 원인 제공자도 다름 아닌 아버지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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