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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동급부 Jun 09. 2024

전학 #1


3학년 때부터 나는 옆반의 H를 좋아했다. 예쁘고 공부도 잘했다.

여자아이들의 대화에서 'H는 아빠가 계시지 않아 힘든 엄마를 위해서 무엇이든 열심히 한다.'는 이야기를 우연히 들었다. 그때부터 확실히 마음이 쓰였던 것 같다.

생각해 보면 1학년 때부터  오래 짝꿍이었던 Y도 예뻤고 B도 귀여웠는데 그래도 그냥 H가 젤로 좋았다. 마음이 있던 이후로 줄곧 H와 같은 반이 되길 바랐고 두 반뿐인 시골학교였는데도, 한 번도 그렇게 된 적은 없었다. 그러다 드디어 6학년 때 한 반이 되었다.


학교에서는 1주일 단위로 6학년 선도부를 뽑아서 질서유지(?)를 했는데 나는 선도부 10명의 선도부장이었다. 한참 수업  중 교실문이 열리면서 4학년 아이가 들어온다. 그 아이는 담임선생님께 “우리 선생님이 6학년 *삼철 데리고 오라 하요” 그 아이의 선생님이 다음 주 선도부 담당이셨고 선도부장인 내게 하실 말씀이 있으셨던 것이다. 물론 나는 그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담임 선생님 왈 "삼철이 너 또 뭔 사고 쳤냐?"

아놔~ -_-  나 사고 안쳤다. 맘 잡고 차카게 살라고 하는데... 우 씨~

순간 걱정반 호기심 반의 표정을 짓고 있던 우리 H “웬 사고?”하며 멋쩍게 웃는다.


완존 스타일 구겼다. 뭐 사고를 전혀 안쳤다고는 말할 수는 없지만 H 때문에 이미지 관리 중이었고만... 선생님 참 너무하신다. 선도부를 훌륭히 마감한 얼마 후 나는 한 많고 탈 많은 서울로 전학을 하게 된다. 별다른 준비도 돌아올 기약도 없이...

혼자만의 착각일지 몰라도, H도 내게 관심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던 것 같고 한 반이 되어서 너무 좋았는데...


전날 책들, 학용품들, 당장 입을 옷들을 챙겨놓았던 책가방을 메고 아버지와 새벽길을 나선다. 이사 1주일 전 학교 때문에 나는 먼저 올라가는 것이다. 좀만 기다리면 엄마 간다고 잘하고 있으라며 눈물바람 하시는 어머니와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작은 형을 뒤로하고 터미널로 갔다.


시외버스를 타고 광주로 가서 다시 광주에서 차를 바꿔 타고 서울로 가야 하기에 학교 가는 시간과 비슷했다. 시외버스에 앉고나서부터 이유를 모를 눈물만 나왔다. 버스 창밖을 보니 우리 반 '*민'이가 냇가 위 다리독을 건너고 있다. 손에 쥔 작은 자동차는 다리난간을 길 삼아 달리고 있었고 입모양으로 알지만 귀에는 들리지 않은 부웅~ 소리를 연신 내며 차와 함께 등굣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뒤에는 항상 붙어 다니는 약간 느려 따돌림을 당하는 '*민'이 단짝 친구가 어김없이 따른다. '*민'이는 착해서 항상 단짝을 챙겨 주었고 손재주가 좋은 녀석이었다.


한두 번 그 둘을 못살게 굴었던 기억이 떠올라 너무도 미안했다. 나 또한 귀에는 들리지 않는 "미안해"를 읇조렸다. 다시 울컥 눈물이 솟구친다. 아버지께 혼날까 봐 겨우 겨우 소리를 들이켜고 있던 순간 버스는 출발하고 멀어져 가는 친구의 모습을 고개 돌려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것이 어린 시절 마지막 시골친구의 모습이다.


정신없고 시끄러운 서울에 도착하자 그 길로 아버지는 동대문시장에 데려가셨다. 생전처음 지하철을 탔는데 맨 앞칸 문 앞에 서있다 사람들에게 벽까지 밀려서 인간 오징어가 되는 줄 알았다. 나는 서울의 힘에 깜짝 놀랐다. 아버지는 가방과 옷 한 벌을 사 주셨다. 촌스러워 맘에 안 들었지만 또 혼날까 봐 다 좋다고 하고 집으로 왔다. 사실 내게 닥쳐온 엄청난 변화로 부담감 외에 아무 생각이 없었다. 서울집에는 오랜만에 보는 큰 형과 작은 누나가 있어 반갑게 맞아 주었다. 처음 사는 전셋집이었고 반 지하였다.


낯선 곳에서의 첫 주말은 작은 누나가 맛있는 걸 만들어 주고 큰 형이 잘 놀아줘서 놀러 온 것처럼 좋았는데, 내일은 새 학교에 가야 한다. 밤새 뒤척이다가 운명의 날이 밝았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아버지를 따라 학교에 갔다. 6학년 1반, 담임선생님은 배가 남산만 한 그래서 금방이라도 아기가 나올 것 같은 여 선생님이셨다. 엄청 무섭게 생기셨다. 선생님이 쌀쌀맞게 칠판에 이름을 쓰라 하셔서 큼지막하게 썼다.


이름을 보고 웃을까 봐 걱정했는데 의외로 웃지 않는다.

‘역시 서울넘들은 다르군!!!’

칠판에 쓴 내 글씨를 보시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신다.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아이들이 대답한다.

“공부를 잘하는 사람~ ”


솔직히 잘 쓴 글씨도 아니었다. 합창 중에 난 앞에서 두 번째 자리에 못생긴 짝꿍 옆에 앉았다. 그때 H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건 좋은데 Y, B 심지어 S까지 보고 싶은 건 뭐람???


지금도 간혹 아련하게 생각나지만 단 한 번의 마음의 표현도 둘 만의 시간도 없었다. 방과 후 자주 가던 삼거리 친구집에 놀러 가는 길, 동네 어귀에서 강아지를 쓰다듬으며 쪼그려 앉아있던 그 아이를 만나했던 짧은 인사와 손짓이 내 기억에 유일한 둘 만의 소통이었다. 보다 편한 복장이어서 그랬는지 장소가 달라서인지 아니면 강아지와 함께이어서 인지 학교에서 본 모습과는 다소 달라 참 예뻤다. 나도 강아지를 무척 좋아한다.


6학년 초 담임 선생님께서 봉고차를 빌려 손수 운전하셔서 반 아이들을 월출산에 데리고 가주셨다. 맨 앞줄에 앉은 H 가장 뒤에 서있는 나, 사진 속 거리 또한 먼... 그때 찍은 사진 한 장이 나와 H가 함께 있는 유일한 기록이다. 쉰을 바라보는 나이이니 그녀도 아들딸 낳고 알콩달콩 잘 살고 있으리라.



언젠가 H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이 말을 꼭 해 주고 싶다.

내 어린 시절의 고향은 네가 있어 더욱 그리운 곳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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