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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 앞의 계절 Jan 27. 2021

아들과 며느리, 뒤통수는 안녕하신가?

                                          




  살면서 뒤통수 맞을 일은 몇 번 생길까? 깜짝 놀라 뒤로 자빠질 정도의 큰일 말이다. 난 누구에게 사기를 당한 적 없다. 돈을 빌려주고 떼인 적도 없다. 솔직히 그럴만한 돈도 없다. 별 탈 없이 아들 딸 키우며 살고 있다. 아들과 딸은 재수하지 않고 곧바로 대학에 입학했다. 아들은 대학을 다니면서 인턴십 과정을 보냈다. 졸업 후, 몇 군데 회사에 입사 지원서를 넣었다. 다행히 가고 싶어 하는 곳에 취직이 되었다. 남들은 취직 안된다고 난리인 시국에 한방에 척하고 붙은 아들이 대견스럽다.  군대 가기 전, 한동안 게임에 빠져 살짝 속상한 적도 있었지만 딱 그 정도다. 게임하느라 집 나간 아들 찾으러 경찰서를 들락거린 동료도 봤다. 그런 거에 비하면 우리 아들 문제는 문제도 아니다.


  아들의 첫 직장은 IT회사로 강남에 있다. 집이 부천이라 지옥철 타고 한 시간 걸린다. "아들, 직장은 어때, 다닐 만 해?" 물어보면 직장 이야긴 안 하고 지옥철 얘기만 한다. 신도림에서 갈아탈 때 사람이 너무 많아 가끔 못 탈 때가 있다고 한다. 사회 초년생이라 지각이 신경 쓰이는 모양새다. 집에서 조금만 더 일찍 나가라고 말해주지만 나가는 시간은 늘 비슷하다. 그나마 인턴십 과정을 경험한 것이 직장 생활하는데 보탬이 된다고 말한다. 쉬운 것은 없다. 처음은 모든 것이 낯설고 서먹서먹하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배워야 한다. 상사와 동료들과의 관계도 잘 사귀어야 한다. 돈을 번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실감 날 것이다. 공짜로 월급을 주는 곳은 없다. 월급을 받기 위해선 그만큼의 일을 해야만 한다. 직장생활이란 그런 것이다. 누구나 그러하듯 어렵다. 그렇다고 무조건 비관할 일은 아니다. 나 혼자만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이 위안이 될 때가 있다. 우린 그런 환경에서 돈을 벌러 나가고 밥을 벌러 나간다. 그렇게 사회를 배우고 사람을 배운다. 남들도 다 하는데 나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못할 것도 없다.   


  아들 출근 열흘째 되는 날,  아들에게 전화가 왔다. 근무시간에 서로 전화를 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나도 직장생활을 하고 있기에 신입사원의 상황을 잘 안다. 신입 때는 솔직히 전화하는 것도 눈치 보인다. 그래서 급한 일이 아니면 전화도 걸지 않는다. 그런데 아들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나도 마침 점심시간이었다.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차 한잔 마시는 중이었다. "아들, 웬일이야? 밥 먹었어?" "응, 먹었어. 그런데 엄마,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 듣고 절대 놀라지 마" 그 이야길 듣는 짧은 순간에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보이스 피싱을 당했나? 회사에서 무슨 사고를 쳤나? 아님 회사에서 잘렸나?"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아들의 다급한 말소리에 갑자기 혈압이 머리 꼭대기까지 치솟는다. 본론은 나오지도 않고 서론만 들었는데 번개 맞은 사람처럼 손발이 떨렸다. 갑자기 뒤통수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어지럽다. 심장 박동이 거세게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아들 중학교 때, 가슴 철렁한 전화를 몇 번 받은 적 있다. 담임 선생님이나 학원 선생님 전화다. 친구들과 축구를 하다가, 학원에서 친구들과 장난치다가 다리를 다쳤다는 전화가 두세 번 있었다. 그 덕에 몇 번 깁스를 한 적 있다. 남자애라 친구들끼리 놀다 보면 그럴 수 있다고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정도의 사고였다. 그런 경우를 제외하면 별로 놀랄 일은 없었다.  


 "그래, 뭔데 말해봐!" "여자 친구가 있는데 임신을 했대" 전화기 너머에서 아들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온다. "임신을 했대에에에에" 아들 목소리는 절벽에 부딪치는 파도소리로 내 귀를 강타한다. 사라지지 않고 다시 내 귀를 맴돌며 에코로 감돈다. 파장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난 내 귀를 의심했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아들이 금방 뭐라고 했지?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이런 걸 두고 청천벽력이란 말을 쓰는 건가? 이런 말을 내가 쓰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사자성어 공부할 때나 듣던 말이다.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곤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다. 정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일이었다.   


  대학 다닐 때 여자 친구가 있다는 건 핸드폰에 있는 사진 보고 알았다. 어느 날 여자 친구 사진이 없어졌다. 딸한테 물어보니 여자 친구랑 헤어졌다고 한다. 그리곤 한동안 여자 친구 사진이 올라온 적 없다. 그래서 여자 친구가 있을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하긴 예상문제는 예상문제일 뿐 본시험 문제는 아니다. 예상을 뒤엎는 반전이 있을 거라곤 정말 1도 생각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아들은 첫 직장에 출근한 지 일주일 정도밖에 되지 않는 새내기 직장인이다. 새내기가 첫 타자로 나와 파울을 친 격이다.  


  일단 퇴근해서 다시 말하자며 전화를 끊었다. 그 전화 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퇴근 시간까지 어떻게 근무를 했는지 모르겠다. 정신이 반쯤은 가출한 상태였다. 옆에 있던 동료들이 무슨 일 있냐며 자꾸 묻는다. 아무 일도 아니라며 둘러대긴 했지만 이미 내 얼굴은 울그락불그락하다.  아들 대학 다닐 때, 이런 말을 한 적 있다. "난 할머니 되기 싫다. 그러니까 사고 같은 거 치지 마라. 절대 책임질 일 만들지 마" 누차 이야기했었다. 주변에서 그런 경우를 본 적 있기에 다만 일만 만들지 말라고 강조했었다. 그러나 말은 말일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대형사고란 이런 것이다. 돈 한 푼 벌어놓은 것 없는 새내기 직장인 열흘차가 졸지에 아빠가 되는 일, 그 아들 덕에 졸지에 할머니가 되는 일,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며느리가 생기는 일, 또 하나의 가족이 어디선가 꼬물꼬물 자라고 있는 일이다. 오래 살진 않았지만 여태껏 살면서 내가 겪어본 일 중에 가장 큰 사건이다. 주변에서 애가 생겨 결혼시켰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속으로 난 이런 생각을 했다. '우리 아들은 절대 그럴 일 없을 거야' 마음속으로 장담하곤 했다. 맞아, 옛날 어른들이 이런 말을 했었지. 절대 자식일은 장담하는 게 아니라고. 그것이 나의 이야기가 될 거라곤 눈곱만치도 생각하지 못했다.


  아들의 선전 포고 후 전쟁은 시작되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눈앞이 캄캄하다. 머릿속엔 한 가지 생각만 떠오른다. 도대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정말 쓸데없는 생각만 동글동글 머릿속을 맴돌고 있다. 손전등도 없이 캄캄한 동굴 속에 갇힌 기분이었다. 그야말로 손전등 하나 살만한 돈조차 없는 상태였다. 아들은 첫 월급도 타지 않는 신입이었다. 벌어 놓은 돈은 당연히 없다. 아들도 아기가 생겼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노라고 했다. 나도 아들 장가보낼 돈을 따로 모아 둔 것은 없다. 대학까지 가르쳐놨으니 아들이 벌어서 가면 될 거라고 생각했었다. 아들이나 나나 둘 다 무방비 상태였다.


  사귀던 남자 친구랑 시댁에 인사를 갔다 왔다는 후배 이야기가 생각난다. "우리 아들이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무조건 환영" 딱 이 한마디만 했다고 한다. 난 그 말을 들었을 때 정말 멋진 시어머니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나도 저렇게 멋진 말을 하는 시어머니가 될 수 있을까? 이런 반문을 한 적 있다. 생각은 생각으로 그치고 말았다. 환상은 환상일 뿐 현실은 아니다. 사전 준비가 하나도 되지 않은 나에게 사고를 친 아들이나 며느리 둘 다 이뻐할 수 없는 처지다.


  난 멋진 시어머니도 좋은 시어머니도 아니다. 결코 그럴 수가 없다. 내가 포기했다기보다 아들이 먼저 포기하게끔 만든 거다. 남들은 아들을 잘못 키운 거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나름대로는 잘 키웠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남의 시선은 중요치 않다. 당장 눈앞에 터진 일이 문제였다. 이제 겨우 직장을 잡았는데 결혼이라니, 정말 기가 막힌 일이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기가 생겼다는데 결혼을 안 시킬 순 없다. 임신 이야기를 들은 순간부터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이 문제가 되었다. 아무것도 준비된 것이 없다는 게 문제다. 돈도 돈이지만 마음도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 길을 헤쳐나갈 특별한 묘수도 보이지 않는다. 배가 부르기 전에 결혼을 시키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결혼을 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러자 생각지도 않았던 것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돈, 집, 아이, 사돈, 등등등. 정말 혼란스러웠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떠한 것도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로부터 한 달 후에 며느리가 서울로 인사를 왔다. 며느리는 미인이다. 아마 우리 아들이 예쁜 며느리에 훅 간 모양이다. 며느리는 대구에 산다. 대구와 서울의 삶은 다르다. 빠듯한 것이 서울 살이다. 나도 지방에 살아봐서 안다. 물론 나 때와 상황은 다르겠지만 말이다. 많은 것들이 맘에 들지 않았다. 지방에 사는 것도 직장을 다니지 않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서울 생활은 만만치 않다. 먹고살기 힘들다. 그러니 단단히 각오하고 살아야 한다. 더군다나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와서 살려면 더 힘들 것이다."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며느리에게 말했다. 아마 모르긴 해도 엄청 무서운 시어머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 사돈어른들과 상견례도 했다.


  맘에 안 드는 일이 하나 더 추가됐다. 사돈어른이 나보다 9살이나 어리다. 거기다 미인이다. 누군가는 치사하게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따진다고 할지 모른다. 자격지심에 그런 거 아니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막상 내 일이 되고 보니 신경 쓰이는 게 사실이다. 겉으로 대놓고 싫어라 할 순 없지만 살짝 짜증이 나는 일이다. 이런 거 가지고 따질 때는 아닌 줄 알지만 그것마저 속상했다.


   빨리 날을 잡기로 했다. 며느리 배가 불러오기 전에. 집도 구해야 하는데 돈은 없다. 집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은 상태다. 난 미리 사돈 한데 건의했다. 서로 예단을 하지 말자고. 난 명품백? 이런 것들 필요 없다고 말했다. 그 돈으로 전셋값에 보탰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난 액세서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관심 없다. 사돈도 그 의견에 합의했다. 그래서 내 한복도 신랑 양복도 우리 돈으로 샀다. 사돈은 사돈이 알아서 했다. 양쪽 집에서 돈 좀 내고 아들이 회사에서 대출받아 전셋집을 구했다. 집을 결정하고 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돈 한 푼 없던 나는 언니 한데 돈을 빌렸다.


  8월 말, 드디어 결혼식을 했다. 뜨거운 여름이다. 며느리 배는 살짝 나오긴 했지만 드레스로 가릴만했다. 결혼식은 며느리가 사는 대구에서 했다. 꼭 거기서 해야겠다는 사돈어른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니 그리 하라고 했다. 결혼식을 할 때도 며느리가 예뻐 보이지 않았다. 예쁜 며느리임에도 불구하고.  며느리도 내가 불편했을 것이다. 내가 어떤 맘으로 둘을 결혼시키는지 알았을 것이다. 얼굴은 미인이었지만 내 맘에 썩 들진 않았다. 며느리가 좋고 나쁘고는 상관없이 여건상 그랬다. 결혼식이 끝나고 신혼살림을 차렸다. 사돈어른들이 지방에 있어서 이사할 때도 우리가 갔다. 필요한 것들을 사들고 갔다. 미우나 고우나 내 아들이고 내 며느리다. 난 사람을 오랫동안 미워하지 못한다. 어차피 내 자식이다. 자식에 대한 미움은 오래가지 못한다. 아마 다른 부모들도 그럴 것이다. 나도 그렇다. 막상 결혼을 하고 살림을 차리고 사는 걸 보니 미워할 수가 없다. 미워했던 마음이 조금씩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며느리는 며느리, 시어머니는 시어머니라는 말이 있다. 한꺼번에 관계가 좋아지진 않는다. 아직도 서로가 서먹서먹하다. 아직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럴 것이다. 차차 좋아질 거라 믿는다.


  그해 가을에 며느리는 예쁜 딸을 낳았다. 아들 결혼 전에 내 뒤통수를 한 방 내리쳤던 그 아이가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그 아이 때문에 아들을 결혼시킨 거나 다름없다. 그런데 아기 얼굴을 보는 순간, 그동안 미워했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린다.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 마음이 금세 달라진다. 꼬물거리는 손과 발가락을 보면 정말 천사가 따로 없다. 눈을 말똥말똥 뜨고 방긋 웃는 모습을 보면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저렇게 예쁜 아이를 내가 왜 미워했을까 싶다. 미워했던 마음을 녹일 만큼 예쁜 짓을 많이 한다. 내 마음을 바꿀만한 매력이 철철 넘친다. "결혼시키길 잘했어, 아기는 혼수라는데 잘된 일이야" 모두들 이렇게 말한다. 나도 지나고 보니 그런 생각이 든다. 그 당시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기에 너무 당황했었다. 당황했던 마음이 미운 마음으로 자리 잡았었나 보다. 지금은 손녀딸 보는 재미로 산다. 신랑은 수시로 아기 보러 가자고 조른다. 코로나 때문에 자주 가지는 못한다. 그래서 화상 통화를 자주 한다. 핸드폰 너머에서 활짝 웃고 있는 손녀의 웃음이 오늘을 살게 하는 원동력이 될 때가 많다. 사랑스러운 손녀딸이다. 그러나 며느리가 사랑스럽진 않다. 역시 나도 시어머니다. 시간이 지나면 좋아지리라 생각한다. 아들과 며느리는 이쁘게 잘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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