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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 앞의 계절 Jan 29. 2021

나는 표류 중

 

 



  나는 지금 어디쯤일까? 망망대해다. 그 한가운데 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 방향을 잃어버렸다. 항로를 고민 중이다. 태양은 뜨고 진다. 배에 올라탔다. 태어나는 순간 이미 배에 올라탄 거다. 강제다. 선택의 자유는 없다. 이미 로그인되었다. 로그아웃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삶은 컴퓨터가 아니다. 인생은 기계가 아니다. 배에 올라탄 순간부터 과거형이 되어버렸다. 배에서 내릴 수도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혼자가 아니라는 거다. 주변에 나와 같은 사람들 많다. 그나마 그것이 위안을 준다. 혼자가 아니라는 것만 해도 스스로 위로가 된다. 그런데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 어느 쪽으로 노를 저어야 할까? 도무지 알 수 없다.


  내 고향은 내륙도시 청주다. 지도 이음새에 바다는 없다. 그래서 바다나 섬에 대한 환상이 있다. 정현종 시인의 "섬"이라는 시가 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시에 대한 해석은 독자 몫이다. 난 이렇게 해석한다. 사람들과 함께 섬으로 간다. 그 섬에서 나뭇잎으로 둥둥 떠다니고 싶다. 태국 파타야로 여행 간 적 있다. 타국의 섬은 낯섦 그 자체다. 낯설다는 건 두려움을 동반하지만 스릴 만점이다. 배를 타고 바다 한가운데로 나간다. 구명조끼를 입고 패러세일링 순서를 기다린다. 하늘을 날 수 있다는 사실에 가격 비싼 것쯤은 참을만하다. 공중에 내 몸을 띄운다는 것이 기분을 설레게 한다. 낙하산에 몸을 묶는다. 날개를 펴는 순간 찬란한 무지개가 된다. 갈매기 한 마리 하늘을 빙그르르 돈다. 순간 나는 허공이 된다. 텅텅 빈 공중이 된다. 바람이 된다.  


  바람소리가 들린다. 파도가 친다. 하얀 파도가 밀려온다. 아니 세월이 밀려온다. 난 참 단순하다. 파도 하면 하양과 파랑 밖에 생각하지 못한다. 다른 색은 생각나지 못한다. 단순함의 극치다. 내가 바라보는 사물들을 저 파도처럼 단순하게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다는 단순하지 않다. 세월도 복잡하다. 계절만 봐도 사계절이 있듯 모든 것은 복잡하다. 해안선을 보라. 곡선으로 펼쳐진 선들이 생겼다 없어졌다 반복된다. 파도의 물결을 보라. 어느 것 하나 똑같은 것은 없다. 모두 다르다. 구불구불 복잡하다. 그것마저도 단순하다고 생각하면 단순해진다. 그냥 곡선이라고만 보면 된다. 약간 휘어졌다고 생각하면 된다. 생각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해석하기 나름이다. 해석은 내가 한다. 내 고집대로 하면 된다. 그러나 고집 피운다고 되는 일은 없다. 바다는 생각처럼 만만하지 않다. 함부로 할 일은 아니다. 함부로 덤벼들어서도 안된다. 미리 분석하고 대들어야 한다. 맞부딪치려면 준비를 해야 한다. 사전 지식이 필요하다. 그런데 무얼 어디서부터 준비해야 하지? 하나부터 열까지 준비된 것은 없다. 그냥 닥치는 대로 파도를 맞을까? 아니지 그러면 안되지 그럼 어떻게 할까?  


  지금부터가 고민이다. 고민은 고민으로 끝날 때가 많다. 고민을 싫어한다. 생각을 싫어한다. 생각 없이 사는 게 좋다. 편한 것이 좋다. 편한 것만 추구하다 지금 이런 상태가 됐는지도 모르겠다. 아마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하면 편하게 살까? 어떻게 하면 고민 없이 지낼까? 어떻게 하면 이 난관을 별 탈 없이 지나갈 수 있을까? 뭐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에 꽉 차 있다. 문제를 해결하려는 생각보다 쓸데없는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우글거린다. 부글부글 거리는 포말 같다. 톡톡 터지는 물방울 같다. 불평이 송알송알 거린다. 불평은 한 번으로 족하다. 눈 부시게 파란 하늘이 머리 위에 있다. 그렇게 불평만 하고 있을 때는 아니다. 햇살이 좋다. 파도는 왔다가 사라진다. 불평도 왔다가 사라진다. 행복도 왔다가 사라진다. 모든 것은 파도 같다. 사랑도 그렇다. 사람도 그렇다. 나도 그렇다. 그렇다고 사라지는 것을 조용히 구경만 하기엔 시간이 아깝다.   


 부산에 간 적 있다. 고깃배들이 바다에 떠 있다. 해운대 바닷가엔 바다 새들로 북새통이다. 가까이에서 바다 새들을 관찰해 볼 기회가 있었다. 다리가 유난히 짧다. 짧은 다리로 저렇게 잘 날 수 있다는 게 대단해 보였다. 사람 다리는 길다. 그래서 걷다 힘들면 다리를 접고 관절에서 쉬었다 가기도 한다. 그럼 멀리 나는 새들도 무릎이 있을까? 날아가다 힘들면 사람처럼 관절을 접고 쉬었다 갈까? 갑자기 궁금해진다. 우리는 먼 길을 가려면 단단히 채비를 한다. "새들아, 역시 너희들도 계획이 다 있구나"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에 나오는 대사 패러디가 필요하다. 바다는 흩어지다 물렁해진다. 물에도 지느러미가 생길 것 같다. 그러면 물도 물고기처럼 헤엄치며 나아갈 것이다. 갈매기는 바람의 텃새다. 돛대 위나 잠들지 못한 돌 섬에 내려앉는다. 그러다 흔들리는 뱃머리가 되기도 하고 섬이 되기도 한다. 흰 포말을 따라 입맛의 벼랑에 잠시 날개를 접는다. 새들의 방향엔 지친 계절이 있다. 서로 접하는 두 개의 뼈처럼 육지와 바다 사이에서 난다. 그러다 부리를 앞세우고 노을처럼 번지는 일몰 쪽으로 날아간다. 배도 갈매기도 다시 시작이다.  


  배는 파도를 헤치며 흔들흔들 나아간다. 승객들도 흔들린다. 흔들리며 산다. 흔들리지 않는 것은 없다. 나도 너도 함께 흔들린다. 바다에도 길이 있다. 다만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눈으로 안 보인다고 해서 길이 아닌 것은 아니다. 박지원 선생의 "열하일기"에 나오는 글처럼 맹인이 눈을 떴으나 도리어 집을 못 찾는 꼴이다. "도로 눈을 감아라. 그러면 네 집을 찾아갈 것이다" 눈을 떠도 감아도 내 집은 내가 찾아가야 한다. 졸린 눈 비비며 찾아봐야 한다. 두리번두리번 헤매 봐야 한다. 어떤 곳은 수심이 깊다. 너무 깊어 헤어나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럴 때를 대비해서 수영도 배워야 한다. 그러나 웬만한 수영 실력으론 택도 없다. 감히 대적하지 못한다.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것이 무엇일까? 찾아봐야 한다. 지금도 찾고 있는 중이다. 수심이 얄팍한 곳도 있다. 그 정돈 가볍게 치고 나갈 수 있다. 적응이 되어 있다. 그만큼의 대미지는 겪어 왔다. 이미 단련된 상태다. 난 쉽사리 돛을 내다 걸지 못한다. 펄럭이게 만들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설사 돛을 단다고 해도 너무 작다. 큰 돛 자체가 없다. 태풍이 닥치면 쉽게 찢어진다. 태풍의 경로를 알지 못한다. 미리 준비해 놓지 않았다. 다만 태풍이 자주 오지 않는 것에 감사할 뿐이다.

 

  길을 찾아 나서야 할 때이다. 나만의 길을 찾아야 한다. 주변 경치에 눈멀면 안 된다. 풍경만 바라보다가는 길을 잃고 만다.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두 눈 똑바로 뜨고 살아야 한다. 태풍이 불어와도 파도가 밀려와도 끄덕 없이 살아남아야 한다. 그러다 보면 언젠간 항구에 도착한다. 도착하기 전에 열심히 노를 저어야 한다. 그전까지 쉼이란 없다. 무조건이다. 무조건 달려 나가야 한다. 정박하면 안 된다. 표류도 안된다. 다만 항해하라. 당신이 그 배의 선장이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님은 이렇게 말한다. 제자들을 향해 소리친다. "선장, 나의 선장, 큰 소리로 불러라. 캔틴, 마이 캡틴 어디 한번 불러봐라." 우물쭈물할 시간 없다. 오로지 앞으로 돌진이다. 후퇴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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