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꽃 앞의 계절 Jan 26. 2021

시어머니는 꼬부랑 할머니

    



                                                               연필 데생 



  우리 시댁은 깡촌이다. 시댁에 처음 인사 간 날을 기억한다. 가을날 저녁 시간이었다. 한 시간에 한 대씩 다니는 버스를 탔다. 손님은 별로 없다. 자리에 앉았다. 연세가 지긋한 손님들 뿐이다. 정장을 차려입은 사람은 나 혼자다. '재는 누구야?' 이런 표정들이다. 오늘은 버스 안 풍경도 낯설다. 사람들이 나만 쳐다보는 것 같다. 온몸의 촉수가 곤두선다. 비포장도로다. 버스를 따라 몸이 움직인다. 왼쪽으로 쏠렸다 오른쪽으로 쏠렸다 정신없다. 정류장에서 내렸다. 사람들의 시선에서는 벗어났다. 시골길은 고즈넉하다. 나지막한 산이 나를 쳐다보고 있을 뿐 다른 시선은 없다. 아무런 시선도 느껴지지 않는 시골길을 걸으려니 괜스레 온몸에 닭살이 돋고 오싹한 기분마저 든다. 이런 시골길은 처음이다. 나도 시골에 산다. 다행히 우리 집은 도로 옆이다. 최소한 아스팔트는 깔려 있다. 아, 이곳은 정말 최악이다. 그 와중에 소낙비까지 내리고 있다. 길은 금세 진창길이 되었다. 기가 막힌 환영식이다. 흙이 구두에 달라붙는다. 개들의 컹컹 소리도 달라붙는다. 동네 입구에 다다랐다. 우물이 보인다. 여름이면 온 동네 사람들이 그곳에서 목욕을 했다고 한다. 집들이 서너 채 보인다. 드디어 시댁 대문이 보인다. 대문을 열고 마당으로 들어선다. 문고리 옆 창호지 안에 납작 눌린 꽃잎이 꼭 내 모습 같다. 잔뜩 긴장한 얼굴로 방으로 들어갔다. 들어서자마자 큰 시누이가 한마디 툭 던진다. '치마가 너무 짧은 거 아냐?' 못 들은 척했다. 혹독한 신고식이었다. 구두 벗을 때 긴장을 같이 벗어놨으면 좋았을 텐데 그리 하지 못했다. 다른 말들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세월이 지나 시댁 깡촌에도 아스팔트가 깔렸다. 야산도 갈아엎었다. 도 다시 지었다. 

    

   시댁 식구들은 촌사람들 답게 다들 까무잡잡하다. 우리 집은 촌사람들 답지 않게 뽀얗다. 우리 시어머니는 키가 작다. 150은 될까? 시아버지는 180이다. 환상의 콤비다. 시댁 식구들 중에 시어머니 인상이 제일 좋다. 눈은 작지만 서글서글한 눈매의 소유자다. 처음 얼굴을 보는 순간, '어쩜 저렇게 귀여우실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어머닌 46살에 우리 신랑을 낳았다. '저 체격으로 어떻게 애를 낳았을까?' 싶을 정도로 작은 체구다. 일반적으로 시어머니에게 귀엽다는 표현을 쓰기엔 무리가 있어 보인다. 그런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 우리 시어머니는 그런 생각이 들게 한다. '내가 네 시어머니다. 그러니 잘 모셔야 한다' 이런 말이나 생각은 없으신 듯 보인다. 혹시나 그런 생각이 있으셨는데 말을 안 하신 것일 수도 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그런 내색은 없으셨다. 두 분이 서있는 모습은 정말 한 편의 코미디다. 서수남과 하청일 같다. 아니 서장훈과 박나래 같다. 두 분이 길을 걸어가시면 정말 볼만하다. 한 분은 저기 앞에서 걸어가고 한 분은 뒤에 멀찍이 떨어져서 걷는다. 혹시 키 차이가 너무 많이 나서 일부러 그렇게 다니셨을까? 싶을 지경이다. 하긴 친정 부모님들도 따로따로 걸어 다니셨다. 굳이 차이를 따진다면 친정 부모님 키 차이는 그리 많지 않다. 시골 분들이 시라 두 분이 손잡고 다니시는 것을 더 이상하게 생각하시곤 했다. 나도 나이가 더 먹으면 신랑과 그렇게 걸으려나? 그건 잘 모르겠다. 부모님 세대만큼 나이가 차면 그때 가서 내가 어떻게 변하는지 볼 일이다.

  

  알 수 없는 게 인생이다. 이문세가 부른 '알 수 없는 인생' 이란 노래가 있다. '언제쯤 세상을 다 알까요, 정말 그런 날이 올까요' 세상을 다 알 수 있는 날이 올 것 같진 않다. 오죽하면 유행가까지 그런 가사가 있을까 싶다. 시, 글자가 싫어 시금치도 안 먹는다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그런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도 시댁은 별로다. 모든 일이 부담된다. 시댁 쪽 사람들이 싫은 건 아니다. 그냥 시댁에 가는 일, 집안 행사들이 싫다. 친정은 제사가 없다. 작은 집이다. 큰집이 있다. 그래서 우리 집은 제사와는 거리가 멀다. 명절에도 특별하게 할 건 없다. 식구들끼리 모여 반찬 해서 먹고 설거지만 하면 된다. 그렇게 편히 살다가 시집을 갔다. 시댁은 제사가 많다. 가장 싫었던 것은 제사다. 나는 막내며느리다. 막내며느리라고 생각하면 별로 할 것도 없는 줄 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다. 막내긴 하지만 신랑이 효자다. 식구들 중 가장 효자다. 막내가 장남 노릇을 한다. 명절이나 제사 때가 되면 장 보는 것은 내 차지다. 식구들 먹을 것은 물론이고 형제들 선물까지 준비해야 한다. 엄청난 돈이 드는 건 아니다. 다른 형제들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게 문제다. 맞벌이하니까 무조건 돈도 잘 벌거라고 생각한다. 외벌이보다 조금 나은 건 사실이다. 반면에 쓰는 것도 두배다. 가족들이 우리에게 거는 기대치도 두배다. 두배로 벌진 못하지만 기대에 부응해야 했다. 억지로 한 건 아니다. 나쁜데 쓰는 것도 아니고 가족들에게 쓰는 거라 좋은 기분으로 쓴다. 돈이라는 게 그렇다. 많으면 좋지만 늘 부족한 게 돈이다. 


  나는 결혼을 늦게 했다. 서른한 살에 했다. 우리 때만 해도 대부분 이십 대에 시집을 갔다. 거기에 비하면 늦은 편에 속한다. 늦게 한 결혼이라 피임은 따로 하지 않았다. 생기는 대로 둘만 낳자는 생각이었다. 허니문 베이비로 딸을 낳았다. 그다음 해에 둘째 아들을 낳았다. 아들 딸은 연년생이다. 첫째를 낳고 분만휴가를 두 달 받았다. 지금이야 휴가가 세 달이지만 우리 땐 두 달이었다. 첫째는 전날까지 근무하고 다음 날 출근해서 낳았다. 둘째는 퇴근하고 집에 갔다가 다시 와서 낳았다. 두 놈다 낳기 전날까지 근무했다. 그땐 힘들 줄 몰랐다. 임신한 채 열심히 직장을 다녔다. 그래서일까 둘 다 작게 낳았다. 딸은 3킬로, 아들은 2.67킬로로 낳았다. 아들은  인큐베이타를 간신히 비켜갔다. 천만다행이었다. 아들을 낳았을 때 시어머니가 올라왔다. 옛날 분이라 손자라면 껌뻑 죽는다. 내가 첫딸을 낳았을 때 시어머니는 병원에도 오지 않았다. 그랬던 시어머니가 시골에서 우리 집으로 상경을 한 것이다. 당신이 직접 손자를 봐주시겠다고. 내가 아이 둘을 놀이방에 보내는 걸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난 직장을 다녀야 했다. 아이 때문에 그만둘 순 없었다. 연년생임에도 불구하고 직장을 포기하지 않았다. 육아 문제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는 직원들을 많이 보았다. 난 그만두지 않았다. 육아 때문에 그만두는 거 자체가 싫다. 내가 그만두고 싶을 때 그만두고 싶었다. 아이들 핑계로 상사 핑계로 동료 핑계로 직장을 그만두긴 싫었다. 시간은 간다. 시간이 지나면 아이들은 큰다. 가는 시간을 어떻게 잘 쪼개 쓰느냐가 관건이다. 


  저절로 되는 일은 없다. 아이들 문제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 싸움거리가 된다. 아이들이 생기고부터는 하루가 멀다 하고 싸운 것 같다. '애가 중요하냐?, 직장이 중요하냐?' '둘 중에 하나를 골라라' '직장 당장 때려치워라'  '이렇게 어린애를 떼놓고 직장 나가는 엄마가 세상에 어딨냐?' 별의별 소리를 다 들었던 것 같다. 정말 오래 싸웠다. 결국은 시어머니가 봐주는 것으로 낙찰을 보았다. 아들 봐주는 문제로 시어머니는 아예 우리 집으로 짐을 싸서 오셨다. 시아버지는 시골에 남겨 둔 채로. 그렇게 시어머니는 나와 같이 살았다. 그때 시어머니 나이 팔십이었다. 이미 허리는 꼬부라진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자를 보시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손자를 남의 손에 맡길 수가 없다고 했다. 난 별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십 년을 시어머니와 살았다. 내가 시어머니를 모시고 산 건지. 시어머니가 나를 모시고 산 건지 구분이 안 간다. 난 고부  갈등이 무슨 말인지 모른다. 그런 일은 나와는 거리가 먼 말이었다. 시어머니는 순하고 착하다. 내가 못하는 일이 있어도 탓하거나 나무라라는 일은 없었다. 손자 크는 재미로 사신 분이었다. 손녀는 이뻐하지 않았다. 무슨 일에서건 두 번째가 되곤 했다. 항상 손자 다음이었다. 공평하게 나눠줘야 한다고 말을 해도 귀뚱으로도 듣지 않았다. 옛날 분이라 당신 생각을 바꾸는 일은 없다. 그렇게 아이들은 할머니 손에 컸다. 애초에 돌까지도 봐주기로 했다. 아들은 두 돌이 되기 전에 놀이방에 입학시켰다. 시어머니가 연세도 많으시고 힘드셔서 그런 결정을 했다. 그때 이미 딸은 놀이방에 다니고 있었다. 우리 아이들은 아주 어려서부터 놀이방에 다녔다. 그래서 그럴까? 시댁을 가든 친정을 가든 항상 내 뒤꽁무니만 따라다녔다. 아마 늘 놀이방에 떼어놓던 엄마가 자기들을 또 떼어놓을까 봐 그랬던 것 같다.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시댁이나 친정에 가면 그 시절 이야기를 하곤 한다.


  시어머니는 정말 손자를 좋아했다. 시댁에서 우리 신랑은 막내다. 시어머니가 46살에 낳았다고 한다. 막내에 대한 사랑은 정말 지극하다. 내가 연년생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은 다 시어머니 공이다. 난 솔직히 살림을 잘 못한다. 직장만 다녀서 집안일에 관심이 별로 없다. 지금도 그렇다. 그런 나에게 우리 시어머니가 딱인 셈이었다. 시골에서 올라온 순박한 할머니였다. 그것도 허리가 꼬부라진 할머니. 동네 아주머니들이 다들 나를 보면 한 마디씩 말한다. 키도 작고 허리도 꼬부라진 할머니가 맨날 애들을 업고 다닌다고.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를 흉보는 것 같았다. 거기다가 난 살가운 며느리도 아니다. 입에 바른 소리도 잘 못한다. 그래서 난 할 말이 없었다. 힘들다고 업고 다니지 말라고 해도 당신이 없고 다녔다. 힘들어도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동네 사람들이 시어머니만 보면 '키도 조그만 할머니가 저렇게 큰 애를 업고 다니냐'며 혀를 끌끌 차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나쁜 며느리가 되었다. 현실이 그러니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는 편이 현명하다. 맞는 것을 아니라고 우겨서 될 일도 아니다. 나 또한 연년생 키우는 게 편하진 않았다. 아침밥 해 먹고 자는 애들을 깨워 놀이방 보내야 하고 나도 출근해야 했다. 저녁에 퇴근하면 아이들 목욕시키고 저녁 해 먹고 늘 피곤에 찌든 생활을 했다. 정말 힘들었다. 그래도 그렇게 건강하게 아이들을 키울 수 있었던 건 시어머니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서 십 년을 사셨다. 사는 동안 나에게 싫은 소리는 하지 않았다. 그저 애들만 좋아해 주셨다. 덕분에 나도 연년생을 수월하게 키울 수 있었다.  손자 장가가는 거 보려면 오래 살아야 하는데 이 말을 늘 달고 사셨다. 그러나 그건 희망사항으로 끝났다.  결국 못 보고 돌아가셨다. 시아버지는 시어머니보다 더 일찍 돌아가셨다. 시아버지는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우리 집에 오셨다. 당신이 가시기 전에 시어머니를 보러 왔던 것 같다. 그리고 난 후 시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시어머니는 구십에 돌아가셨다.  그런데 두 분 돌아가신 날이 같은 날이다. 이런 우연도 있다. 태어나고 죽는 날이 같은 운명도 있다. 물론 년도는 다르지만. 그래서 시어머니 시아버지 제삿날이 같은 날이다. 이런 일은 흔치 않다고 한다. 시누이들이 며느리들에게 말한다. 세상에 이렇게 복 받은 며느리들은 없을 거라고. 며느리들이 전생에 무슨 좋은 일을 했나 보라고. 제사 신경 쓰지 말라고 노인네들이 같은 날 돌아가셨다며 다들 한 마디씩 한다. 그렇게 두 분 다 하늘나라로 멀고 먼 여행을 떠났다. 



이전 02화 나는 표류 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