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찰라다
예전에 <그것이 알고 싶다 : 간병살인을 말하다> 편을 보면서 남일 같지 않은 그들의 가슴 아픈 사연에 많이 울었다. 그 중에 한 어르신의 잔잔한 말이 끝까지 남아 나에게 물음을 던졌다.
지적장애 2급의 아들은 온 집안의 불을 껐다 켰다하며 밤새도록 잠을 안자고 돌아다닌다. 덕분에 치매의 노모 또한 잠을 못 잔다. 그러다가 아들이 볼일이라도 보고 여기저기 묻히고 다니면 노모는 그것을 치우러 아들 뒤를 쫒아 다녀야 한다. 냉장고에는 곰팡이가 핀 음식들이 가득해도 치매 노모는 그것들이 상한 음식이라는 것조차 모른다. 그렇게 각자의 몸 하나도 제대로 챙기기 힘든 사람 둘이 한 집안에서 부대끼며 살아가고 있다. 직장과 가정 때문에 멀리 떨어져 사는 딸은 돌봐드리지 못한다는 죄책감과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하는 걱정에 시달린다. 치매로 인한 의심증에 낮선 사람을 집안으로 들이는 것을 싫어하는 노모를 제작진의 도움으로 겨우 사회복지사와의 상담이 이루어진다. 노모는 사회복지사에게 조용히 속내를 털어놓는다.
“나이도 너무 많고
그만 살고 싶은데...”
그 분이 힘겹게 조용히 내뱉은 말은 아들 걱정도, 딸에 대한 미안함도 아닌 죽고 싶다는 그 말 한마디였다. 다행히 방송 제작진의 도움으로 치매 노모를 돌봐줄 사람과 아들이 입소할 수 있는 시설까지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그 당시 방송을 볼 땐 정말 잘됐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치매 노모는 정말 그것을 원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만 살고 싶은데...” 하는 그분의 조용하지만 단호한 말이 잔향처럼 남아있다.
아무래도 아버지가 옷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은 것 같아, 옷을 한 벌 사고는 중랑천을 따라 걸어서 집으로 가기로 했다. 마음도 울적하고 커피 한잔 마시며 걷고 싶었다. 중랑천을 따라 천천히 걷다보니, 지나가던 사람들이 멈춰서 개천을 내려다보며 미소 짓고 있다. 나도 멈춰서 쳐다보니 잉어로 보이는 한 무리의 물고기가 어우러져 헤엄을 치고 있다. 예전에 아버지가 간혹 나와 낚시를 하시던 곳이었다.
빚에 집이 넘어가고, 조그마한 다세대에 전셋집을 얻어 이사 나왔는데 그곳이 바로 중랑천 근처였다. 그 당시 아버지는 술로 세월을 보내고 계셨고, 답답할 때는 낚싯대를 가지고 한강 근처나 중랑천 근처로 나오곤 하셨다. 그때만 해도 낚시가 가능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 간혹 식구들이 모일 때도 아버지는 무슨 중요한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낚싯대를 챙겨 나와 버리시곤 하셨다. 식구들 얼굴을 보는 것은 좋은데,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은 불편하신 것 같았다.
사업이 망하기 전에는, 가족들과 식사하고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던 분이셨다. 술이 취해 늦게 들어오시는 날이면 자고 있는 우리 모습이라도 보고 싶어 방문을 열려는 아버지와 애들 깬다고 그런 아버지를 말리는 엄마의 실랑이가 잠결에 들리곤 했었다. 그러면 아빠는 엄마라도 붙잡고 이야기를 하셨고, 엄마는 하품을 해가며 밤늦도록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어 줘야 했었다.
개천에서 한가로이 노니는 물고기들을 보던 아이가 먹던 새우깡을 던져주자 물고기들이 과자로 몰려든다. 이에 신난 아이가 과자를 쏟아주자 물살을 가로지르며, 물 위를 점프하며 사방에서 무서울 정도로 물고기들이 모이기 시작한다.
아빠 사업이 잘 되었을 땐, 돈과 함께 사람들이 밀려들어, 특히나 명절 땐 사람들로 넘쳐났다. 사람을 좋아하던 아버지는 식사 후에라도 손님이 오면 다시 식사와 술을 함께하며 밤늦게까지 못 가게 붙잡으며 이야기를 나누곤 하셨다. 이러다보니 어떨 땐 하루 6끼가 넘는 식사를 하기도 하셨다. 그러나 사업이 망한 뒤로는 돈과 함께 사람들도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넘치게 준비한 음식이 남기 시작했고, 음식을 줄이자는 말에도 아버지는 손님이 올 거라며 한동안 음식을 많이 준비하는 것을 고집하셨다. 명절에 아버지는 누군가 오기를 기다리다가 소파에 기대 꾸벅꾸벅 졸다가 낮잠이 들곤 하셨다.
앉아서 잠이 든 아버지를 보고 나는 방에 가서 편하게 주무시라고 하면, 엄마가 조용히 그런 나를 말리셨다. 젊어서 공사판에서 일하다 앉아서 자는 것이 습관이 되어, 곧잘 앉아서 주무신다고 깨우지 말라고 하셨다. 먼지로 가득한 공사판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자고 있는 젊은 날의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하루는 아버지가 좋아하는 만두를 사갔는데 아버지가 낚시하러 가셨다는 소리를 듣고는 만두 식기 전에 드시라고 챙겨서 중랑천으로 나갔었다. 아버지는 낚싯대를 드리우고는 쪼그려 앉아 주무시고 계셨다. 구부정하니 강가에 쪼그려 앉아 졸고 있는 아버지. 난 마음이 짠해져 “아빠”하고 깨우니 아빠가 깜짝 놀라며 눈을 뜨신다. 집에 가서 주무시라고 하니, 집에 있으면 답답하다고 여기가 편하다고 하신다. 아빠에게 만두를 건네며 보니, 작은 바구니에 고기가 몇 마리 보인다.
“왠일이야. 고기 많이 잡았네.”
"오늘은 잘 안 잡힌다."
"에이~맨날 빈손이었으면서"
"집에 가져가면 뭐해. 냄새 난다고 다들 싫어하는데."
".....아빠, 다들 오기로 했는데 같이 식사하게 집에 있지.”
"내가 없는 게 더 낫지."
"무슨 소리야. 집에 가자."
"엄마가 생선도 해놓고, 잡채도 만들어놨다. 놀다가 저녁까지 먹고 가라."
사업이 망해도, 돈이 없어도 누구하나 눈치 주는 사람 없는데도 아버지는 그렇게 잔뜩 기가 죽어 가족조차 어려워했다. 그런 아버지에게 유일하게 위로가 되어주었던 중랑천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흐르고 있지만, 아버지는 이번생에 다시 이곳에 와서 낚시하시는 일은 없을 것이다.
지나고 보니 모든 것이 찰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