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하다!
요양원으로 옮긴지 얼마 안 돼서 아버지는 워커에 의지해 걷는 것이 아니라, 워커를 번쩍 들고 걸어 다닐 정도로 기력을 회복하셨고, 어눌한 말투도 사라져 헛소리 일지라도 또박또박 나름의 논리로 의사 표현을 하셨다. 인지능력 빼고는 모든 것이 좋아졌다.
그러나...아버지의 회복이 마냥 좋은 결과만 가져 온 것은 아니었다.
한동안 온순하시고 예의바른 어르신으로 누구에게나 친절하던 아버지는 아프지도 않는데 자기를 가둬놓고 집에 안 보내준다며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시는 일이 부쩍 잦아졌다. 면회를 가면 화를 내는 아버지를 달래고 돌아오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문제는 우리에게만 이러는 것이 아니라 요양원에서도 난리라는 것이다. 문제를 일으켜 요양원에서 퇴소라도 하게 된다면 정말 큰일이다.
아버지는 사람들이 자기 물건을 훔쳐 간다고 화를 내시고, 간병인이 챙겨주는 약을 독약이라고 화를 내시며 약을 안 드시고, 엄마가 통장에 있는 돈을 빼간다고 집에 가야 한다고 엘리베이터 앞에 하루 종일 서 계시기도 한다는 것이다. 증상을 들으니 아무래도 지난겨울 섬망증에 시달리던 그때로 돌아가 버리신 것 같았다.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건강이 회복되면서 섬망증이 도진 것 같았다.
난 예전에 받았던 섬망증 치료에 대해 말하고 요양원에 처방을 부탁했다. 그런데 요양원 측은 함부로 약을 처방할 수 없다며 보호자가 병원으로 모시고 나가 처방 받아 오라고 한다. 전에 있던 민간요양원은 수시로 더 많은 약을 처방해서 드시게 했었는데, 이곳은 확실히 다른 것 같았다. 그러나 일단 모시고 나오면 요양원으로 다시 들어가지 않으려고 하실 것 같아, 우리는 요양원에 달마다 진찰 나오는 촉탁의사에게 부탁 해달라고 했다.
촉탁의사의 처방으로 약을 드신 아버지는 증상이 많이 완화되셨고, 난 간식을 챙겨 오랜만에 면회를 갔다. 비대면 면회실 유리벽 너머로 아버지가 차분하다 못해 차가운 모습으로 앉아계신다. 지난번 면회 때처럼 화가 나 있으신 건 아닌가 해서 눈치를 보는데, 아빠가 요양원에 돈을 얼마나 내고 있냐고 물어보신다. 돈 걱정을 하시는 것 보니 정신이 돌아오신 것 같다. 요양원비는 우리가 알아서 하고 있으니 걱정 마시라고 했다.
“그때 죽게 내버려두지...”
"...?"
"죽는 게 낫지. 이러고 살아서 뭐 하겠니!”
"무슨 소리야? 죽긴 왜 죽어"
"이렇게 살아서 뭐 하겠냐고! 나 이렇게 살기 싫다!”
"....."
"내가...죽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데...병원도 안가고... 약도 안 먹고!
죽으려고, 죽어버리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데... 그냥 죽게 내버려두지 그랬니.”
"............!"
쿵하고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혼수상태로 종합병원에 실려 갔을 때, 의사가 당쇼크라며 당뇨약을 제대로 먹은 것 맞냐고 물어봤었다. 우리는 요양원에 아빠가 드시는 약들을 전달했기에 당연히 복용하고 계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아빠가 일부러 안 드신 거였나... 빨리 죽고 싶어서... 그래서 예전에도 치매인 것도 숨기고, 암도 눈치 채셨을 텐데 병원도 안 가시고, 결국은 요양원에서 약도 안 드셨나 보다. 죽고 싶어서. 빨리 죽어버리고 싶어서 ... 일부러!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린 나이에 혈혈단신 서울로 올라와 모든 것을 이루고, 모든 것을 잃으셨던 분이셨다. 뱀의 머리가 될지언정 용의 꼬리는 될 수 없는 분. 남 앞에서 꿀리는 걸 끔찍하게 싫어하시는 자존심 강하신 분이, 치욕스럽게 아기 취급 받으며 돌봄을 받고 있다. 아버지는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을 원하셨을거다.
순간 나도 모르게 울컥 올라오는 억울함. 그래서 어쩌라고... 그럼 내가 아빠를 죽이기라도 해야 했었나. 지금 우리가 아빠를 살려놨다고 우릴 원망하는 건가... 아빠도 못하는 걸 왜 우리에게 강요하나. 지켜 드리지 못해 죄송하다고 생각했는데, 보내드리지 못한 걸 죄송했어야 하는 건가...
잔인하다...!
그렇게 내 가슴을 후벼 파는 소리만 해대고 들어가 버리신 아버지. 난 자리를 못 뜨고, 잠시 그대로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뭐라도 잊어버리신 듯 이내 다시 돌아오셨다. 이번엔 또 뭔가 싶어 긴장해 쳐다보는데, 아빠가 갑자기 바지를 잡아당기며 옷이 없어서 여자 옷을 입고 있다며 옷을 가져다 달라고 하신다. 아빠가 입고 있던 옷은 부쩍 추워진 날씨에 따뜻하게 입으시라고 지난번에 사다 드린 기모 바지였다. 고맙다고 잘 입겠다고 하셨었는데, 지금은 옷이 없어 창고에서 여자 옷을 주워 입었다며 짜증이시다.
미치겠다...
방금 전에는 살려놨다고 원망을 쏟아 놓으시더니, 이제는 입고 있는 옷을 여자 옷이라고 우기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