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리필
Memento mori (메멘토 모리)
Carpe diem (까르페 디엠)
당신도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현재 순간에 충실하라
아버지가 혼수상태였을 때, 우리는 무조건 아버지를 살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내달렸다. 다행이 아버지는 중환자실에서 의식을 되찾으셨고,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기뻐했다. 그러나 우리는 단 한 번도 아버지 스스로가 살아남에 안도하거나 기뻐하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오히려 제정신으로 돌아오시면 원망으로 눈물을 흘리곤 하셨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아버지가 죄를 지어 벌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님에도, 단지 나이가 들어 병이 든 것뿐인데도, 아버지는 자신이 죄를 지어 벌을 받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셨다. 그러면서 당신은 단돈 천원 한 장도 남의 돈을 훔친 적이 없고, 단 한 번도 다른 사람을 해코지 한 적이 없다며 억울해하셨다.
사람 사는 세상이 착한 사람은 복 받고, 나쁜 사람은 벌 받는 그런 공평한 세상이었나. 세상은 불공평하다. 아빠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실일 텐데 떼를 쓴다. 오히려 착한 사람은 하늘이 사랑해서 더 빨리 죽고, 나쁜 사람은 욕 많이 처먹어 오래 산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착한 사람은 이래저래 살기 녹록치 않은 곳이 바로 우리가 사는 이곳이다.
원망한다고 들어줄 사람도, 해결해 줄 사람도 없다. 하느님? 부처님? 종교가 없는 내 입장에서 보면, 적어도 신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이 세상이 이렇게 부당함과 불공평이 넘치는 이런 엉망진창인 세상 일 리 없을 것 같다. 이것도 신의 뜻이라고? 그런 신이라면 뭐 하러 믿고 따르나!
난 새로 산 옷과 간식을 준비해 요양원에 가서 상담을 요청했다. 그리고 나중에 혹시라도 아버지에게 응급상황이 발생하면, 응급실로 이송하기 전에 우리가 올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부탁했다. 요양원 측은 응급상황에서 그럴 시간이 없다며 일단 자기네가 병원 응급실로 환자를 모시고 가면, 보호자는 병원으로 직접 오면 된다고 한다.
지난번에 한번 해봐서 그런 절차는 안다.
난 아버지가 어떤 생명 연장 치료도 원하지 않으셨다고 말하고, 고통스러워하는 환자를 방치하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병원으로 모시고 갈 수 있게, 어떤 치료든 우리의 동의하에 이루어질 수 있게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행정상의 절차보다 한 인간의 고통에 대한 이해와 배려를 부탁하고 싶지만, 그 사람들에게 아버지는 단지 입소자 중 한명일 뿐이다.
고통스러운 생명 연장을 원하지 않은 아버지를 위해 병원과 요양원을 오가는 ‘죽음의 사이클’만은 멈춰드리고 싶다. 때가 되면 지켜드리려 애쓰기보다는 고통스럽지 않게 잘 보내드리려 애쓸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내일 일지, 한 달 후 일지, 일 년 후 일지 모를 일이지만, 아빠와 함께 할 수 있는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해보려고 한다. 전화도 자주 하고, 시간되는 대로 자주 찾아가 뵙고, “사랑한다”, “고맙다”는 말도 넘치게 자주 해드리겠다. 오늘은 컨디션이 좋으신지 옷도 마음에 든다고 하시고, 간식을 챙겨왔다고 하니 고맙다며, 미안하다며 눈물을 흘리신다. 아픈 뒤로 아빠가 울보가 되어버렸다.
당신의 젊음을 받쳐 키워 온 우리가 뭐 그리 대단한 걸 한다고 그렇게 고마워하시고, 그렇게 미안해하시는지...
시간은 정말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흘러가는 것 같다. 지팡이를 짚고 걸어가시는 분이 내 부모가 될 줄 몰랐다. 요양원 창살로 창밖을 내다보는 분이 내 아빠가 될 줄 몰랐다. 집에 가면 언제나 “왔니”하면서 나를 반길 것 같았는데...
아빠가 가시는 길을 언젠가는 나도 가야 할 날이 올 것이다. 더 이상 내가 나 자신을 챙기기 힘든 그런 시간, 독립적인 생활을 할 수 없는 그런 시간들이 올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영원할 것 같았던 이 모든 것들이 끝나는 순간이 오겠지. 시간은 무한리필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지금 내게 주어진 시간을 소중히 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