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늘고 길게'
아버지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코로나 발발 2년이 넘어가고 있고, 아버지 역시 치매 악화 2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걷는 것도 힘들어하셔서 이제는 휠체어 없으면 이동을 못 하시고, 우리를 알아볼 때보다 못 알아볼 때가 많으시다. 건강도 부쩍 안 좋아지셔서 응급실로 모시고 가는 일도 많아졌다.
그날도 식사를 못하시고 하루 종일 누워만 계신다는 요양원 전화에 우리는 아버지를 모시고 응급실로 갔다.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아버지를 겨우 병원에 모시고 가더라도 의사는 딱히 해드릴 것이 없다며 수액 정도 놔주고는 퇴원시켰다. 그래도 수액 덕에 조금이나마 기력을 회복하신 아버지에게 죽이라도 사서 수저에 떠 넣어 드리면 아버지는 “선생님, 감사합니다”하며 열심히 받아 드신다. 최근에는 우리를 전혀 기억 못하신다.
이렇게 겨우 생명줄을 붙잡고 계시던 아버지는 3차 백신까지 맞았는데도 오미크론 확산세가 무서울 때 결국 코로나에 걸리셨다. 요양원에 계시는 어르신들과 직원들 상당수가 오미크론 확진으로 코로나 전담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다. 병원에서는 아빠가 주사바늘을 뽑고 서 계시지도 못하는데 자꾸 침대에서 내려오려고 하신다며 좀 묶어놔도 되냐고 물어봤다. 아빠의 상태를 익히 알던 우리는 그러시라고 했다. 기력도 약하신 분이 코로나 확진까지 힘든 삶의 무게를 지고 아픈 몸으로 모든 가시밭길을 한 걸음 한 걸음 피를 흘리며 걸어가는 아버지를 제발 더는 그만 보고 싶다.
그러나 아버지의 시련은 아직 끝나지 않았나보다.
죽어가는 고목처럼 앙상한 몸으로 휠체어에 앉아 병원을 나서는 아버지. ‘아빠’하고 불러도 이제는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웅얼웅얼 말도 못 하시고, 목이 마르신 것 같아 물 한잔 드려도 바르르 떨리는 앙상한 손은 허공만 헤매고, 입에 넣어드리니 반 넘게 흘리고 겨우 입을 적시는 정도만 드신다.
아빠가 없는 세상 상상이 안가지만 ...
그만 고생하시고, 그만 아파하시고
편하게 쉬셨으면 좋겠다.
요양원으로 들어가는 아버지를 보며 남은 시간만이라도 집으로 모시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것에 죄송스럽기만 했다. 요양원에 처음 들어가실 때처럼 칼을 들 기운도 없어지신 아버지. 폭력적이긴 커녕 내가 처음 요양원에서, 요양병원에서 뵙던 어르신들처럼 살아 계신건지 돌아가신 건지 구분도 안 되는 누워만 계시던 어르신들처럼 그렇게 되어버린 아버지. 집으로 모신다면 당연히 24시간 간병인이 필요하고, 모든 수발이 필요한 몸집이 크신 아버지와 고령의 노모를 생각하면 간병인 한명으로는 힘들 것 같기도 하다. 이로 인한 과도한 비용 부담을 우리가 언제까지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 없어 감히 집으로 모시자는 말을 꺼내지 못하고 침묵 속에 조용히 아버지를 다시 요양원으로 모셨다.
부자도 그렇다고 가난하지도 않는 각자 자기의 삶을 책임질 정도는 되는 경제력들을 가지고 있더라도 아버지 한 분 모시는 게 삼형제 모두 힘을 모아도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었다.
그래도 내가 돈이 많았다면, 내가 부자였다면, 아버지를 조금 더 잘 모실 수 있었을 텐데 하는 후회가 가슴을 친다. 자기 부모 하나 제대로 돌보지 못할 정도로 형편없이 살아 온 것 같아, 때늦은 후회와 자책이 나를 후려친다.
자유?! 욜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아메리카노 대신 커피믹스를, 짜장면 대신 짜파게티를, 호텔 대신 게스트하우스를, 자동차 대신 지하철을 ... 그렇게 '가늘고 길게' 간다면 가능할 것 같았다. 몇 개월은 놀고, 결혼도 안하고 한없이 깃털처럼 가벼운 인생을 살고 싶었다. 어느 순간부터 이런 생활이 얼음이 녹아버린 아이스 아메리카노처럼 맛이 없어지긴 했어도 그 나름 익숙해져서 흐리멍텅 적당히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아버지가 아프시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인생의 숨겨진 복병에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랄까. 내 나이 들어가는 것만 생각했지, 내 부모 늙어가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다. 나만 대충 살 것을 생각했지, 아픈 내 부모를 돌볼 생각은 못했다. ‘자유’도 ‘욜로’도 ‘존재의 가벼움’도 내 옆에 사랑하는 사람을 제대로 챙길 수 있을 때에 행복이 되는 것 같다. 어린애도 아닌데 늙은 부모의 든든한 버팀목은 되지 못하고, 오히려 걱정거리가 되고 있는 나 자신이 한심스럽게 무책임해보여 나 자신이 너무 싫어졌다.
남들은 부동산으로 주식으로 재테크를 해서 부를 쌓고 있는 동안에 난 드라마나 보고, 잠만 자고 있었다. 나이만 많았지 경제관념 제로인 나. 오스카 와이드가 “젊었을 때는 인생에서 돈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이 들어보니 그것은 사실이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1854년 태생의 소설가로 대략 1874년에 대학을 갔다하니 지금으로부터 족히 150년 전에 활동했던 작가였다. 그도 아는 사실을 난 돈 없으면 지옥이라는 대한민국에 살면서 아직도 제대로 몰랐다니 이건 무지몽매가 아니라 그냥 돌대가리인거다.
아버지가 ‘정신 차리라’고 내 등짝을 후려치는 것 같았다. 가시는 길에 못내 못미더운 딸자식이 눈에 밟히시는 듯 그렇게.
보더섀퍼의 <이기는 습관>이라는 책에 아프리카에서 원숭이를 사냥하는 독특한 방식의 이야기가 나온다. 아프리카에서는 원숭이를 사냥할 때 사냥꾼들이 지름 6cm정도인 나무구멍에 달걀 크기의 돌을 집어넣는다고 한다. 그러면 이를 본 원숭이가 호기심에 구멍에 손을 넣어 그 돌을 빼내려 하지만, 돌을 잡은 손으로는 구멍이 작아 손을 뺄 수 없단다. 돌을 놓으면 간단한데 원숭이는 절대 돌을 놓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게 원숭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사냥꾼은 원숭이를 덥석 붙잡는다는 것이다.
익숙하게 붙잡고 있던 돌을 두려움에 놓지 못하는 원숭이. 익숨함에 중독되어 온갖 자기 합리화로 기존의 삶에 안주해있던 나. 붙잡고 있던 돌을 놓아야 할 때이다. 보석이라도 되는 양 움켜잡고 있는 그것은 그냥 돌일 뿐이다.
사시는 동안 기나긴 가시밭길을 걸어오신 아버지에게 가시는 걸음걸음 꽃을 놓아드리진 못할망정, 못내 아픈 손가락으로 마음 무겁게 만들어 드리고 싶지 않다.
아버지가 가장 원하시는 건 자식들이 행복하게 사는 것이지 않을까 싶다. 아버지의 떨리는 손을 힘껏 잡아드릴 수 있는 든든한 딸로 그렇게 곁을 지켜드리고 싶다. 그리고 행복하고 당당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드려 가시는 발걸음 조금이라도 가벼워지시길...
아버지 사랑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