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공기의 움직임. 얼굴을 간지럽히는 바람이 있는가 하면 가슴을 헤집어 놓고 가는 바람이 있다. 솔바람이든 칼바람이든 손으로 막을 수 없다.
지난가을, 스페인 여행을 다녀오신 어머님은 사그리다 성당을 방문한 날 밤에 꾼 꿈 이야기를 해 주셨다. 아무리 세계적인 관광지라지만 불교 신자인 정배 여사가 성당에 들어설 때는 스스로 방문의 타당성을 만들어야 했을지 모른다. 그 때문에 정배 여사는 성당을 사찰로, 마리아를 부처로 보기로 작정하고 성소에 입장했다. 전국의 사찰이란 사찰은 다 다녀보고 대만 삼사 순례도 다녀왔지만, 여태껏 이처럼 거대한 성지는 처음 보았다. 정배 여사 말에 의하면 죽기 전에 한 번은 구경해야 할 건축물이라고 한다. 더더군다나 이 건물에 철근이 들어 있지 않다는 말에 놀라움은 배가 되었다. 종교의 구분을 떠나 규모에 압도돼 굳이 부처가 아니어도 그곳은 은혜로운 곳이 되어 버렸다.
패키지여행이 으레 그러하듯 그날도 수백 걸음을 걸어 호텔에 들어가선 곧장 깊은 잠에 빠지는데, 한국에서도 잘 보이지 않던 영감이 스페인 꿈자리에 따라왔다고 했다. 꿈은 기억을 반영한다. 영 터무니없는 이는 등장하지 않는다. 또한 내 꿈이지만 주체가 될 수 없다. 죽은 사람처럼 수동적으로 꿈을 받아먹어야 한다. 죽은 영감과의 해후도 잠시, 살아생전처럼 꽁무니에 여자 하나를 달고 나타났다. 정배 여사 가진 걸 모조리 뺏어 그 여자에게 갖다주는 것도 모자라 여자를 떠맡기며 잘 부탁한다는 말까지 하고 사라졌다. 머나먼 타국에서 만난 반가움도 없이 원망이 앞섰다. 즐거웠던 여행 수기를 말하면서도 눈물이 났다. 그러나, 할 말은 많고 여든다섯의 감정은 사춘기처럼 촐싹댄다. 여자만 맡기고 떠난 줄 알았던 영감이 다시 나타난 부분에선 어느새 또 화색이 돈다. 이번엔 뭔가 썸씽이 있으려나 했는데, 석원 씨는 정배 여사에게 비밀을 알려주듯 우물 하나를 알려주었다. 과연 영감이 말한 곳에 가 봤더니 우물이 있고 물이 찰랑찰랑하더라며 얼굴이 환해졌다. 물 많은 우물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나 정배 여사는 그걸 성당에서 받은 은혜인 양 길몽으로 여긴 게 틀림없다. 어디 가서 절대 발설하지 말라는 주의까지 주는 걸 보면.
인물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커플이었다. 영감 죽고 나서 유품이라곤 남기지 않은 정배 여사도 신혼 사진 한 장은 남겼다. 칼날 같은 턱선에 비율 좋은 눈코입, 북슬북슬한 털 달린 가죽 재킷을 입은 모습이 요즘 말로 도시남 분위기다. 정배 여사도 다르지 않다. 계란형 얼굴이 통통하니 복스럽다. 허리를 빠짝 조른 꽃무늬 원피스 맵시가 아이돌 못지않다. 그때만 해도 계 모임을 집에서 하던 때다. 내비게이션이나 티맵 대신 물어 물어 길을 찾던 때, '이 동네 인물 좋은 사람 집이 어디요?'라고 물으면 정확히 석원 씨 집을 가르쳐 줄 정도였다고 했다.
두 사람이 만났을 때 정배 여사는 한참 공장에서 끗발을 날릴 때였다. 월급이 아니라 일명 '돈내기'로 다른 직원들 서너 배의 돈을 벌어들이고 있을 때 지인의 소개로 만났다. 정배 여사는 석원 씨에게 홀랑 반해 버렸다. 몇 차례 만남이 오가고 가족들에게도 소개하기에 이르렀다.
"정배야, 그 사람 인물값 하게 생겼더라."
집안 아재비가 정배 여사에게 걱정스레 귀띔했다. '인물값'이라는 게 좋은 의미보다는 무능이나 부도덕을 일컫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어른들의 예감은 과학적인 증거가 없을 뿐 오랜 축적으로 빚어진 통계나 진배없다. 예쁘고 야무진 조카가 걱정되어 한 말이었을 테고 말귀 못 알아들을 정배 여사도 아니었다. 다만, 새겨듣지 않았을 뿐.
'인물값 하면 내가 먹여 살리면 되지'
당장에 석원 씨를 놓치고 싶지 않은 정배 여사는 설령 그가 인물값을 하더라도 당신이 먹여 살리면 된다고 터부시한다.
석원 씨의 바람은 결혼 첫해부터 시작되었고 아재비의 염려는 금방 현실이 되었다. 인물값 정도는 능히 감당하리라던 정배 여사도 미처 예상치 못한 일들을 맞고 맞고 또 맞았다. 아주 오랫동안. 부부간의 일들은 아이들에게 고스란히 전염되어 괜스레 눈치를 보고 주눅이 들고 자주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부자유친은 남의 일이 되었고 아버지의 바람이 아버지 탓이 되었다가도 어느 날은 정배 여사의 탓이 되기도 했다. 석원 씨 사주팔자엔 '천복'이 들어서 복 많은 사주라고 하나 그건 마치 당신에게만 유효한 복 같았다. 다행히 손대는 일마다 돈이 붙었으나 돈은 곧장 색을 불렀고 부도덕은 무능을 초래했다. 등락 폭 큰 주식 종목처럼 왕창 벌다가 한창 백수로 지내기도 했다. 그때마다 정배 여사는, 당신의 예언처럼 인물값 하는 석원 씨와 식솔들을 책임져야 했다. '늙으면 보자'하고 떠나지 못하는 자신과 자주 타협했다. 그러나 늙어 보니 복수는커녕 병시중만 기다리고 있었다. 청청한 느릅나무 같은 기세는 사라진 지 오래고 기 빠진 몸뚱어리만이 당신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었다.
"바람이 부는 걸 내 손으로 막을 수 없듯, 인연으로 오는 바람도 어쩔 수가 없더라. 바람처럼 불고 가야 끝이 나더라."
마음만 먹으면 안 되는 일이 없는 정배 여사였다. 그러나 바람은, 바람만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알 수 없듯 끝도 알 수 없어 당신 힘으로 어찌할 수 없었다고 젊은 날을 회상했다. 석원 씨는 일흔둘에 훨훨 떠나고 정배 여사는 제2의 삶을 시작했다. 그 없으면 콱 죽어버리겠다던 청춘은 온데간데없고 그 없는 지금이 제일 팔자 편한 때라고 말씀하신다.
오늘도 정배 여사는 복지관에 간다. 보란 듯 배를 내밀고 씩씩하게. 그것이 자신에 대한 보상이라는 듯, 영감에 대한 소심한 복수라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