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5시 집을 나선다. 갑자기 날씨가 추워졌지만 상쾌한 아침이다.
남편과 함께 지방에 있는 평생교육원으로 강연하러 가는 길이다.
오랜만에 마시는 새벽 공기는 기분 좋게 알싸하다. 새벽 고속도로에서 보이는 바깥경치 또한 평소와 달리 신비롭다. 얼마쯤 갔을까 찬서리 덮인 산천이 아침 햇살을 받아 아른아른 빛을 내며 나에게 속삭인다. 이만하면 충만하지 않느냐고. 우리 부부가 이 나이까지 함께 존재하는 것, 뜻을 같이 할 수 있다는 것, 아직 찾아 주는 곳이 있다는 것 모두모두 감사하지 아니한가.
고속도로 졸음쉼터에 잠깐 들렀다. 화장실을 가기 위해서다. 문을 여는 순간 경쾌한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온다. 깨끗한 양변기에 화장지는 물론 손을 씻을 수 있는 세면대까지. 고속도로변의 정식 휴게소 화장실 환경이 너무 좋아진 것은 모두 아는 사실이지만 졸음 쉼터의 간이 화장실까지 이렇게 깨끗한지는 몰랐다. 그 나라의 생활 수준을 알려면 공중화장실이 얼마나 위생적인지를 체크하면 된다는 말이 있다. 정식 휴게소도 아닌 간이 화장실이 이 정도 수준이라니, 그만큼 사회기반시설이 뒷받침되었다는 증거다. '내가 정말 선진국에서 살고 있구나'라는 생각에 감사함을 느낀다. 그동안 여러 나라를 다녀봤지만 공중 화장실에서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는 곳은 없었던 것 같다.
나는 1953년 생으로 우리의 화장실의 변천사를 모두 경험해 본 세대이다.
내가 최초로 사용한 화장실은 용변을 거름으로 쓰던 시절 푸세식 변소였고, 국민학교 3학년 때 아버지 따라 시골 학교로 전학 갔을 때는 학교 관사에 살았기 때문에 푸세식이라도 실내 복도에 출입구가 연결돼 있어 편했다. 그 당시 친구네 집에 가보면 뒷간이라 불리는 곳이 있었는데 한쪽에 재가 있어 용변을 보고 나서 재를 한 삽 퍼서 덮어 놓았다. 그것이 모여 발효되면 거름이 되었던 모양이다. 뒷간 한쪽 에는 볏짚이 한 단씩 있었는데 그것은 화장지 대용으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친구들과 숨바꼭질할 때면 그 뒷간 한쪽 구석에 있던 볏단 뒤로 몸을 숨기고 있었던 기억이 나를 미소 짓게 한다. 우리 집은 그래도 아버지가 신문지를 잘라 화장실 안에 매달아 놓았었다. 그러다 언제부터인가 부드러운 일력 한 장씩 구겨 썼을 때의 만족감, 또 중학교 때 평화 봉사단에서 온 영어 선생님이 꽃무늬가 있는 냅킨 한 장을 주었는데 그게 일회용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아 오래도록 간직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랬던 우리나라가 불과 몇십 년 만에 웬만한 아파트에는 화장실이 두 개 이상 있는가 하면 가는 곳곳마다 넉넉한 화장지 비치는 물론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화장실을 사용할 수 있다. 이 한 가지만 보아도 선진국민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져도 충분하다.
또 한 가지 우리나라가 선진국이라는 확신은 '평생교육 시스템'이라고 생각한다. 대학은 물론 지방 어느 곳이든 평생교육원이 있어 누구나 공부는 물론 본인에게 맞는 취미 활동까지 모두 할 수 있다. 내가 소속되어 있는 '기흥 아카데미'만 해도 '어문학' '컴퓨터학' 생활교양학' '예술학' '스포츠건강학' 실용음악학' 등 70과목 이상의 강좌가 연중 진행된다. 수강료도 아주 저렴하니 돈 없어 공부 못한다는 것은 옛말이 되었다. 그뿐인가 지역마다 공공 도서관이 있어 원하는 책은 모두 찾아볼 수 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우리 어렸을 때를 생각하면 천지가 개벽한 느낌이다. 배우고 싶은 것 찾아 나서기만 하면 된다. 공부할 수 있는 멍석은 나라에서 다 깔아주었으니 그 위에서 내가 놀기만 하면 된다. 이 좋은 혜택을 본인이 게을러서 누리지 못한다면 억울하지 않겠나. 내가 원하는 것 찾아 멍석 위에서 신나게 춤을 추어보자.
오늘 강연 대상은 평생교육원 수강생으로 50~80대 어른들이다. 나의 강연 주제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 최대한 늦게까지 사랑하고 일하고 춤춰라'로 정했다.
이 주제는 프랑스 대문호가 우리 인생에 권하는 지혜롭게 나이 드는 법을 알려주는 책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를 읽고 공감하여 따온 구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