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햇살이 투명한 찬 공기에 뿌려진다. 상쾌한 아침이다.
떡집의 떡시루에서는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고, 그 옆 빵집에서는 버터빵 굽는 고소한 냄새가 나의 발걸음을 머뭇거리게 한다.
가로수는 어느새 나목이 되었고, 붉게 타오르던 단풍잎도 절정을 만끽하고 오그라 들어 을씨년스럽다.
겨울나무들을 보며 생각에 잠긴다. 봄에는 꽃을 피워 세상을 환하게 밝혀주고, 여름에는 무성한 잎으로 그늘을 만들어주고, 가을에는 아름다운 단풍으로 우리를 황홀경으로 이끌어주고, 겨울에는 그 화려함을 미련 없이 다 벗어던지고 찬바람과 맞서며 새봄을 기다리는 의연함.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저 묵묵히 자기 할 일을 충실히 하는 겨울나무들에게 속삭인다. 나도 너를 닮고 싶다고.
도서관으로 향하는 산책길은 언제나 나를 사색에 잠기게 한다. 찬바람 맞으며 떨어져 날리는 낙엽을 바라보다 문득 '나뭇잎 프레디'가 생각난다.
햇살이 눈부시게 빛나던 따뜻한 봄날, 나뭇가지 끝에서 아주 작은 연둣빛 잎새로 태어난 프레디, 어느새 말라 오그라진 모습으로 마지막 순간을 기다린다. 죽은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며 두려워하는 프레디에게 친구 다니엘은 이렇게 말했었지.
"한 번 생각해 봐, 넌 봄에서 여름이 됐을 때 두려워하지 않았잖아, 여름에서 가을이 됐을 때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건 모두 자연스러운 변화였던 거야, 그런데 왜 죽음의 계절에 대해서는 두려워하는 거야?"
"새벽녘, 바람이 다가와 혼자 남아있던 마지막 나뭇잎 프레디를 가지에서 떼어낸다.
프레디는 전혀 아프지 않았다.
프레디는 고요히 허공에 떠올라선, 하늘거리듯 부드럽게 아래로 아래로 떨어져 갔다. 그가 사르르 눈을 감자 살포시 졸음이 몰려온다."
프레디는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는 것도, 눈이 녹아 물이 된다는 것도, 쓸모없는 자신이 물과 섞여 나무를 건강하게 자라게 한다는 것 또한 몰랐다. 그것은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하는데 말이다.
나이가 들어가니 떨어져 구르는 낙엽도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프레디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다가오는 날을 맞이해야지 다짐한다.
프레디를 만나고 사색하다 보니 어느새 도서관에 도착했다. 이번 달에 읽고 있는 류 시화 작가의 또 다른 책을 빌린다.
인디언 연설문집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제목만 보고 읽어보고 싶어 도서관에 왔는데 책을 찾고 보니 거의 90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책이다.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역사, 철학 등이 고스란히 담긴 책이다. 이 책은 유시화 작가가 15년 동안 자료를 찾아 번역했다고 한다. 인디언들에게는 글이 없었다. 구전으로 내려오는 것을 영어로 받아쓴 그 방대한 자료들을 오랜 시간에 걸쳐 발굴해 번역한 류시화 작가님께 존경을 표한다.
'에드워드 커티스는 1868년 미국 위스콘신주 화이트워터 근처에서 태어났으며,1896년 처음 아메리카 인디언 사진을 촬영하기 시작한 이후 30년간 북아메리카 전역을 돌며 다양한 인디언 부족들의 마지막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4만 장 이상의 사진을 남겼으며, 인디언들의 연설과 음악도 1만 건 이상 녹음했다. 처음에 그의 작업은 먼지 속에 묻혀 있었으나, 1948년 재 발견되어 세상의 평가를 받게 되었다. 단순한 사진이 아닌 아메리카 인디언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을 담은 그의 사진 작품들은 미국 스미소니언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나저나 이 방대한 책을 어떻게 다 읽나, 일단 대충 훑어본다. 인디언 부족들의 격언, 침략자 백인들에게 보내는 연설문, 인디언 남자들의 일곱 가지 철학, 아메리카 인디언 도덕률 등 흥미로운 내용이 넘쳐난다.
천천히 책 속으로 들어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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