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저렇게 나이들고 싶어_
# 그녀를 다시 본 날
"여보~ 잠깐만 나 이것만 좀 보고 "
예능프로그램 유퀴즈에 나온 윤여정 편을 보느라 마트 가는 시간도 뒤로 미뤘다. 입국 심사대에서 여권을 성의 없게 던지며 ' 너 코리아가 어딘지 알아? '라고 묻던 시대에, 미국으로 건너가 아이 둘을 낳았다.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는 잊혀버린 중년의 여배우가 되어 있었다. 바닥부터 악착같이 일했다. 아들 둘이 아니었다면 일하러 나오지 않았을 거라는 그녀의 말에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 윤여정에 열광하는 이유
나이 많은 세대를 두고 비꼬거나 비하하는 말을 만들어내면서, 윤여정과 밀라논나(유튜브 구독자 90만 명을 거느린 ' 햇빛은 찬란하고 인생은 귀하니까요 '의 저자)에는 열광하는 MZ 세대의 기조에는 무엇이 깔려 있을까.
꼰대, 틀딱 (틀니 딱딱) , 연금충 (연금 축내는 사람), 나일리지 (나이 + 마일리지), 노슬아치 (노인이 된 것이 벼슬아치)
나이가 흠이 되는 사람은 꼰대, 틀딱이라 불리고, 나이가 지혜가 되는 사람은 아이콘으로 불린다. 그들을 가르는 가장 큰 원인은 바로 불통에서 온 것 같다. ' 입 닫고 내말 들어. 내가 다 겪어 봐서 알잖아 ' 식의 존경받고 대접받고 싶어 하는 마음. 그렇게 곱지 않게 나이 들어 버린 사람들. 그들 때문에 생긴 비아냥거림 들이다.
그렇다면 많은 MZ 세대들은 윤여정에게 왜 열광할까? 그들에게는 ' 제대로 나이 든 사람 ' 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어른답게 현명하게 늙는 사람들이야 말로 진정한 멘토가 되어 줄 수 있으니깐. 누구나 먹는 나이에 대한 프라우드를 갖는 사람은 원치 않는다. 그런 것들은 젊은 사람들에게 그 어떤 감흥도 주지 못한다.
윤며들게 하는 가장 큰 매력 중 하나에는 ' 솔직함 '이 있다. 모르는 건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있다. '내가 나이 들었다고 왜 다 알아야 되는데? 나도 76이 처음이야. 나도 내 나이가 처음이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말이다.
내가 나이 들었다고 왜 다 알아야 되는데?
나도 76이 처음이야.
나도 내 나이가 처음이라고.
두 번째는 흉내 낼 수 없는 ' 내 것 '이 있다.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윤여정만의 것, 요즘처럼 희소성에 열광하는 MZ 세대의 키워드와 꼭 맞다. 남의 가치관에 흔들리지 않는 것. 오스카 시상식에 입어만 달라고 온 250벌의 명품 드레스를 거절하고 본인이 선택한 의상을 입는 것. 그렇게 윤여정이라는 브랜드가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가 꼰대라고 지칭하는 사람들은 이와는 반대다. '우리 때 다 그랬어'라고 말한다. ' 우리 ' 가 빠진 자리에 ' 내 ' 가 있어야 함을 모른다.
# 나는 사실 그녀의 어둠에 주목한다
내가 사실 윤여정에게 윤며든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어두운 동굴을 통과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의연함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윤여정은 결혼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 갔다. 그리고 미국에서 아들 2명을 낳았다. 한참 잘나가던 시절에 돌연 사랑을 쫓아 미국으로 넘어간 그녀. 그리고 낯선 땅에서 경험한 혹독한 시련들, 귀국 후의 이혼.
화려한 여배우로서의 삶에서 돌연 12년 동안 밥하고 빨래하고 살았던 전업주부로서의 시간들. 다시 돌아왔을 때 바닥부터 시작하고 해내야 했던 책임의 시간들. 그렇게 그녀는 생활형 연기자가 되었다. 윤여정은 시종일관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나는 그냥 돈이 없어서 연기했다.
돈이 나에게 가장 급할 때, 가장 절실한 연기가 나왔다.
뭐든지 그런 것 같다.
절실할 때, 급할 때야말로 최선을 다하게 된다.
그런 시간들은 그녀를 얼마나 단련 시켰을까. 그 짓누르는 어둠에도 물러 서지 않고 버텨 낼 수 있는 그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 내가 그것보다 더 한 것도 겪어 봐서 아는데 '라는 말을 어떻게 입 밖으로 내뱉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한 시간들이 그녀를 한국인 최초 오스카상 수상자라는 영예를 안게 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 또 나왔다 그놈의 운
그녀는 이 모든 게 사고였고, 운이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렇게 그녀의 식대로 겸손을 표현한다. 인생에서 가장 암흑 같았던 시기에 어쩔 수 없이 배우게 됐던 차곡한 영어 실력이 영화 미나리와 윤식당에서 빛을 발했다. 이혼에 생활고를 겪던 그녀가 내몰리듯 할 수밖에 없었던 진심을 담은 연기. 두 아이들을 책임져야 했기에 일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 그러고서 그냥 단순히 ' 운이에요 '라고 정리하듯 말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의연함이 있었을까. 우리가 모두 알듯 그냥 되는 것은 없다.
# 꼰대 : 벗고, MZ : 쫓지 말고 내 안에서
자주 꼰대로 지적되는 우리의 엄빠들 베이비붐 세대들도 자식, 손주들은 그만 생각하고 이제라도 자신만의 인생을 꾸리길. 각자의 ' 내 것 ' 속에 들어 있는 인생의 지혜를 아낌없이 풀어 주는 더 많은 시니어 멘토들이 나오길 바란다.
끝으로 잘못된 희소성이 향하고 있는 요즘의 오픈런(가오픈, 박재범 소주, 포켓몬빵 등 ) 문화에 너무 열광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봐야 남는 건 비워지는 당신의 지갑뿐일 테니깐 말이다. 알맹이가 빠진 덧없는 치장은 당신을 대변해 주지 않는다. 그러니 변하지 않는 유일한 ' 내 것 '을 챙기길 바란다.
잊지 말자고요.
그녀의 웃음과 주름이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이유.
진실 그리고 '윤여정' 자체의 희소성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