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탈리의 샤콘느가 흐르는 작은 공부방, 듣는 연주보다 하는 연주의 즐거움을 잊은 지 너무 오래되었다는 생각에 이르러 먼지 묻은 바이올린울 집어 들었다.
연주자로서는 퇴화될 정도로 둔해진 손과 함께 이미 그 기능을 상실한 듯 장식용으로 생명력을 잃어가는 애장품에 대한 예의일 것 같아서다. 큰맘 먹고 샤콘느 악보를 집어든다. 이 미숙한 연주자에게는 엄청난 난곡이다. '콜 니드라이'도 한 번 제대로 연주하고 싶지만 역부족이다.
마침 읽고 있던 책에서 재독철학자 한병철은 꽃으로 장식된 방에서 그랜드피아노로 연주를 즐긴다고 한다. 놀라움에 눈을 크게 뜨고 이야기를 따라갔다. 그가 바흐를 얼마나 잘 연주하는지 책에서 밝히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듣는 연주'보다 서툴지만 '하는 연주'의 즐거움을 누리려는 욕망 때문은 아닐지 짐작한다.
이 나 홀로 피아니스트는 발터 벤야민을 지독히 존경한다고 한다. 그것은 물론 그의 깊은 예술철학 세계 때문이겠지만, 유대인으로 나치의 광풍을 피해 국경을 넘어 탈출하다 발각되어 안타까운 나이에 자살한 슬픈 운명에서 비탈리의 샤콘느를 연상했기 때문은 아닐까.
작은 소품 몇 개를 켜다가 다시 케이스에 집어넣었다. 손에 익은 노르웨이 민요 '당신의 소중한 사람'은 언제나 편한 곡이다.
Susanne Lundeng - Jeg Ser Deg Sote Lam (수사네 룬뎅 - 당신 곁에 소중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