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해방

by 마디


비행기표를 예매했다. 올 여름을 기약하던 여행은 금세 손에 잡힐 만큼 가까워졌다. 고작 몇 정거장이면 끝나버릴 듯 좁았던 삶이 마치 아무리 걸어도 닿지 않을 만큼 길어진 것만 같다. 나는 일상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었던 건지도 몰라.

아니 사실 알고 있었어.

웃음기 없이 차갑게 찌든 내 모국어가 지겹다.



*

푸릇한 것들에 대한 갈증이 한계에 다다랐다. 오늘은 꼭 숲에서 글을 쓰고 싶었다. 상상 속 그곳을 닮은 데가 있을까 고민하던 중 엄마가 데려가 주었던 카페가 떠올랐다. 미로 같은 철문을 지나 이층으로 올라가면 보이던 넓은 대나무 숲. 얇은 셔츠만 걸치고도 맞을 수 있는 바람이 그립다.


버스에서 내려 지하철로 갈아탔다. 느지막한 오후 시간대엔 내 또래 사람들이 거의 안 보인다. 형형색색 화려한 바람막이를 걸친 어르신들뿐이다. 우린 당신들에게 친절하지 못한데 왜 그렇게 바라보나요. 빈틈없이 꽉 막아버린 귓속에 그들의 애정이 비집고 들어온다. 셔츠를 잡아당기며 빈자리에 앉으라고 사정없이 흔드는 손짓. 우리가 친절하지 않아서 미안합니다.

지상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닫힘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문은 다시 열리고 있었다. 열리는 문을 보고 서둘러 오는 사람들에게 앞서 탄 남자는 말한다. 천천히 오셔. 같이 타고 가요. 집 밖으로 나가는 순간 내 눈과 귀는 얼마나 좁아지는지, 낯선 이들을 왜 모두 전도하려는 사이비 취급하는지. 언제부터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 게 경계할 일이 되어버렸는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골목길을 걸었다. 봄 햇살이 등에 내려앉았다. 아직 따뜻하다고 부르기엔 이른 온도였지만 걸을 만했다.


이 년 전 보았던 대나무 숲은 여전했다. 평일이라 한산한 내부에 안심하며 초록의 기운이 가득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서늘한 듯 살랑살랑 들어오는 바람에 머리칼이 흔들린다. 바람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계절이 왔구나. 작년 이맘때 입었던 옷차림이 기억나지 않는다. 괜찮아. 다시 새롭게 만들어가면 되지. 아껴뒀던 시집을 펼쳤다.

인간은 오래되고 희미한 기쁨의 필적들을
주워 모으는 절박한 수집광

모두가 이리도 삶에 애착을 가질까. 삶이 누구에게나 애증일 것이라곤 확신할 수 있을 텐데. 이 시집을 왜 아껴뒀는지 십분 이해하다가 시집에 파묻히고 싶다고도 잠깐 생각하다가... 이토록 잔잔한 풍요로움에 감격한다. 불안을 잊을만큼 충만한 시간은 더 없는 선물이다.


제법 올라간 기온에 고민 없이 주문한 아이스 커피를 한 모금 마실 때마다 몸이 서늘해진다. 그러나 체온은 금세 제자리를 찾아온다. 훅 빨려 들어갔다 잠시 빠져나오게 만드는 사소한 방해가 때론 영감이 된다. 세상 모든 움직임 앞에 초연해질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혼자서는 도무지 따라갈 수가 없는, 눈앞에 있는 모든 역동을 바라본다.

화,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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