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하고 싶다며~
2020년 코로나 시국, 너무나 평범한 아침 생전 나에게 한 번도 전화를 건 적이 없던 친한 언니의 남편의 번호가 떴다. 유치원선생님이 천직이라 믿으며 자신의 일을 정말 사랑했던 언니였다. 아이들과 눈 맞추고 손잡고 안아주며 수업을 했던 것들이 코로나로 모두 화상수업으로 바뀌어 모든 것을 새로 배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와중에 사이가 좋지 않았던 남편과 집안에 갇혀버린 언니는 세상과 완전히 단절되는 고립감을 느꼈다. 직업을 통해 느끼던 자기 효능감도 잃어버리고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남편과의 관계에서 외로움을 심하게 느낀 언니는 결국 결국 불면증, 불안장애, 우울증 등 정서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언니에게 무슨 일이 있나 보다 직감한 나는 바로 전화를 받았고 그는 언니가 어제 자살을 했다고 했다. 코로나 격리시작 6개월만이었다. 정확히 2주 뒤, 언니의 자살과 그로 인한 충격과 상실감으로 인한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너무 아끼는 동생의 남편이 심장마비로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그때가 내 인생의 또 다른 전환점이 되었다.
죽음은 마치 우리 집앞문 앞까지 온 것 같았다. 언니도 오빠가 그렇게 허망하게 가고 그다음은 마치 우리 집 차례인가? 싶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들이 그렇게 허망하게 떠날 수 있다면 나도 남편도 그럴 수 있다는 말이었다. 2주 간격으로 그들의 장례식에 참석하며 남편과 나의 장례식을 상상했다. 남편과 여행을 함께 가주지 못해 땅을 치고 후회하는 내 모습이 그려졌다. ‘아! 여행은 반드시 가야 하는 거구나.‘라고 마음이 바뀌었다. 내 인생에 ‘나중에, 다음에’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 지금’ 남편의 꿈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내가 이토록 남편의 꿈을 꼭 이루어주고 싶었던 이유는 남편이 먼저 나의 꿈을 이루어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번번이 거절당하고 무시당했던 나의 꿈을 남편은 한 번도 '안돼'라고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고 싶었던 그림도 배우고, 되고 싶었던 심리치료사, 미술치료사가 되었고, 단란한 가정도 꾸리고 사랑받는 아내도 되었다. 결핍덩어리, 상처투성이였던 내가 나다워질 수 있도록 그는 진짜 '부모'처럼 나를 뒷바라지했다. 나는 그의 사랑 안에서 정말 쑥쑥 자랐다.
결국 모든 해답은 사랑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랑이 아닌 경우도 많다. 사랑이란 이름의 투자, 기대, 집착, 욕심이 얼마나 많은지 나는 상담실에서 많이 보았다. 부모는 사랑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자식에게 정성을 들인 만큼 ‘착한 아이, 남들에게 자랑이 될만한 아이‘가 되길 바라는 부모도 많다. 부부, 연인사이도 마찬가지였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속박하고 통제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진짜 사랑은 대가 없이 베푸는 것이었다. 남편은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돈을 잘 벌어오길 바라거나, 훌륭한 사람이 되길 바란 적이 없다. 그는 하고 싶은 것이 있는 나를 기특하게 여기고 그냥 밀어준 것이었다. 그 조건 없는 사랑이 어린 시절 그토록 찾아 헤매던 안정감 그리고 사랑받는다는 것, 인정받고 수용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내 안의 가득 찼던 열등감, 상처도 대부분 사라지고 내 마음에 응어리로 남거나 한이 될 만한 것이 별로 없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주지 못했다. 호기심 많고 모험적인 남편을 늘 제지하는 편이었다. "아~그런 건 위험해. 이제 와서 뭐 하러, 그건 현실가능성이 없어."라는 부정적인 말들로 그를 매번 맥 빠지게 했다. 그게 계속 마음에 걸렸다. 말로는 늘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의 꿈을 이루지 못하게 끝까지 막는다면 남편이 혹 먼저 떠나고 나서 내가 너무 미울 것 같았다. 그래서 여행을 가기로 했다. 남편을 위해서 꼭 해주고 싶었다.
진짜 사랑을 받은 자는 절대로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받은 만큼 보답하고 싶은 게 사랑이었다. 남편은 집값과 생활비가 최고로 비싼 실리콘 밸리에서 이십 년 넘게 외벌이를 하며 하고 싶은 게 무지 많았던 내 뒷바라지를 다 해주었다. 주중에 열심히 돈을 벌고 또 주말엔 아이들을 데리고 외출을 자처했다. 내가 집에서 편안하게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해 준 것이었다. 그때 당시 남편은 매번 이번 주 토요일은 여기 동물원 다음 주는 저쪽 동네 놀이터에서 육아를 도맡아 했다. 그 세월이 거의 18년이 넘었다. 그런 남편의 헌신을 잊으면 사람이 아닌 것이다. 그랬기에 나 또한 남편의 꿈을 그냥 무시할 수 없었다. 그의 꿈을 이루어주려면 한 살이라도 먼저시작하는 게 맞았다.
정말 영화처럼 한순간에 나의 생각은 바뀌었지만 현실이 따라주기까지는 4-5년이 걸렸다. 세월이 흐를수록 마음은 더 확고해졌고 여행을 위한 작은 걸음들을 옮겼다. 여행에 데리고 다닐 2개월 된 강아지를 미리사서 건강검진, 예방접종도하고 훈련도 완벽히 시켰다. 남편의 사업도 점진적으로 줄여갔다. 정말 가까운 지인들에게 언뜻언뜻 여행이야기를 시작했다. 마침내 작년 말부터 본격적으로 실행에 옮겼다.
뭐든 시작하기 전에 공부부터 해보는 나는 유튜브나 인스타에서 보여주는 미국캠핑카생활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사건사고가 많았고 예상치 못한 일들도 있다는 걸 알았다. 특별히 트럭이나 캠핑카가 길 위에서 문제가 생기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타이어가 터지기도 하고, 물이 새기도 했다. (너무 무서웠다.) 캠핑카가 꼼짝 못 할 날씨를 만날 때도 있고 좁은 공간에서 아이들과 오래 있다 보면 생기는 문제도 당연히 있었다. 그 모든 일어날 수 있는 문제들과 걱정들을 남편에게 소상히 알렸다. 그때마다 남편은 '‘그 정도는 내가 다 할 수 있어. 걱정하지 마. 나한테는 그런 건 문제가 안돼. 그런 최악의 상황까지 생각하면 세상에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라며 큰소리쳤다.
남편은 기본적으로 부지런하고 힘든 일을 피하지 않는다. 거기다 겁도 없고 손재주도 뛰어난 편이라 웬만한 잔고장이나 자동차 문제는 알아서 잘 해결했다. 어떤 문제든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편이다. '남들이 할 수 있으면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 만약 아무리 세계여행을 가고 싶다고 해도 남편이 게으른 편이거나 회피적인 성격이었다면 나는 아예 말도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남편의 부지런한 성향과 도전적 성격이 오히려 캠핑카여행과 잘 맞을 것 같다고 생각했기에 우린 계속 밀고 나갔다.
트럭을 사고 캠핑카가 집으로 들어올 때까지는 모든 것이 순조로워 보였다. 까다로운 남편이 원한 모든 것을 갖춘 캠핑카를 중고사이트에서 만났을 땐, 이건 정말 하나님의 뜻이구나 싶었다. 워낙에 꼼꼼하고 철두철미한 남편과 지극히 현실적인 나의 궁합은 잘 맞았다. 우리의 완벽한 준비는 우리를 좀 덜 힘들게 해 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여행을 시작하기 전, 내가 여행으로 인한 걱정과 불안을 보일 때마다 자신만 믿으라며 호언장담하던 남편은 캠핑카를 타고 몇 번 여행을 하고 난 뒤에 상당히 지친 얼굴로 나를 보며 ' 날 좀 덜 사랑하지 그랬어. 뭘 그렇게 내 꿈까지 이루어 주겠다고 애를 썼어'라며 웃었다. 그만큼 힘들었다.
캠핑카여행은 남편이 해야 할 일이 거의 70-80%가 넘는다. 일단 그 큰 차를 운전해야 했다. 아무리 운전에 자신만만한 사람이라도 12미터가 가까운 거대한 트레일러를 달고 운전하기는 쉽지 않았다. 길고 무거운 트레일러는 속도를 줄이는 일도 커브를 도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고속도로에서 갑자기 끼어드는 차나 차선을 바꾸는 일조차 긴장의 연속이었다. 2-5시간 이런 긴장감을 유지하며 운전해야 했다.
그것으로 끝나면 캠핑카 여행자가 아니다. 캠핑장을 잘 찾아서 차가 정차하고 나면 트럭과 캠핑트레일러를 분리하고 트레일러가 꿀렁거리지 않도록 지지대도 세워줘야 한다. 전기, 물, 오수처리관까지 연결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이 잘 작동하는지 까지 확인이 필요하다. 그리고 나면 수리 보수 작업이 시작된다. 캠핑카 안에선 물건들을 아무렇게나 둘 수가 없다. 덜컹거리는 도로 위에서 올려두었던 물건들이 다 떨어져서 부서지기 일쑤였다. 그런 것들을 살피고 미리미리 고정시켜야 했다. 캠핑카는 주로 가벼운 소재로 만든다. 가벼워야 그나마 운전할 때 쉽고 연비절약도 되고 타이어도 금방 망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쉽게 문짝이 떨어지기도 하고 이음새로 붙어놓은 플라스틱들이 쉽게 떨어지기도 했다. 그 모든 잔 고장 수리도 남편 몫이었다.
그리고 나면 진짜 남편의 본업이 시작된다. 지저분한 것을 싫어하는 남편은 아침저녁으로 청소기를 돌렸다. 캠핑장은 주로 흙바닥이라 먼지가 금세 집안으로 들어왔다. 결혼하고 쭉 식기 세척기를 유용하게 썼던 우리지만 캠핑카에선 매번 설거지를 해야 했다. 식사준비가 내 담당이니 설거지는 남편이 주로 했다. 그 사이 심심한 아이들을 데리고 놀아주는 것도 모두 남편의 일이었다. 당연히 엉덩이 붙이고 앉아있을 틈 없이 그는 바빴다.
웬만한 일들은 힘들다 하지 않던 그도 “ 와 정말 RV여행은 아무나 못하는 거였네. 생각한 것보다 몇 배는 힘든 것 같아. “
그런 그에게 나는 ”원래 꿈은 힘든 거야. 다들 대학 가는 게 꿈이고 직장 가고 결혼하고 임신하는 게 꿈이라고들 하지. 그 꿈 때문에 인생이 힘들고 괴로운 거지. 하지만 해본 거랑 포기하는 건 엄청난 차이가 있어. 적어도 후회는 없잖아. 힘들었던 기억은 나중에 더 큰 추억이 될 테고 더 뿌듯할걸. 아마. “라며 나는 웃었다.
그의 꿈이 나의 꿈이 되었다. 30-40년 후에 머리가 다 하얗게 세고 나서 "우리 그때 여행한 번 해볼걸. 그때는 뭐든 할 수 있었는데"라며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내 인생을 돌아보며 한이 없는 것은 나답게 살았기 때문이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남편의 지원과 응원 덕분이었다. 사랑하는 사이라면 사랑하는 사람이 그/그녀다워지도록 도와주고 응원하는 것이라 믿는다. 그 사랑이 다시 그를 그답게 살도록 응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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