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히려 좋은 기회가 될지도 몰라
기적적으로 내 마음은 바뀌었지만 나는 아이들을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 “나는 그렇다 치고 아이들은 어떡할 거냐?”는 말에 남편은 “당연히 애들은 좋아하지. 학교도 안 다니고 여행 다닌다는데.” 아동심리전문가의 남편은 이렇게 아이들에 대해 무식하고 짧은(?) 소견을 가지고 있었다.
아이들은 엄마아빠만 있으면 최고고 놀기만 하면 장땡인 어린 영유아가 아니었다. 아들과 딸은 사춘기였다. ( 만 20세가 된 큰 딸은 제외였다. 성인이 된 그녀는 혼자 살겠다며 단번에 거절했고 우린 그녀의 의견을 존중했다.) 부모보다 친구와 또래의 소속감도 중요하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자신의 정체성을 탐구해야 하는 사춘기였다. 그 시절엔 학교, 학원이나 동아리 같은 공동체의 역할이 누구보다 중요하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특별히 사춘기부터는 자신이 관심 있고 잘하는 것을 찾아서 거기서 실력을 쌓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도 중요하다. 그래야 자신에 대한 효능감을 느끼고 자아상이 건강하게 발달하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선 아이들이 꾸준히 무언가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어야 하는데 여행을 다니면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였다. 특별히 막내딸은 오래 하던 댄스팀도 있고 체조도 열심히 배우고 있었는데 모든 것을 쉬어야 했다. 아이가 힘들어할 것이 뻔히 눈에 보였다. 그래서 남편에게 "우리 막내까지 다 키우고 우리 둘이 편하게 여행 다니자"라고 회유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 나는 여행을 가려고 하는 이유가 아이들과 더 많은 추억을 만들고 싶어서 그래. 우리가 평생 이러고 여행을 다니는 게 아니잖아. 해봐야 1-2년인데 애들 평생 인생에서 1-2년 정도 여행 다닌다고 큰일 나지 않아. “라고 말했고 나는 묘하게 그의 말에 설득이 되었다.
입시를 하다가 1-2년 재수를 할 수도 있고 몸이 아파서 1-2년 늦게 졸업할 수도 있다. 가정형편이 안 좋아서 학교를 휴학하고 아르바이트를 해야 할 수도 있고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을 갔는데 적성에 맞지 않아 3-4년 방황하는 아이들도 상담하면서 숫하게 보았다. 다른 가정을 향해 아이들 인생에서 1-2년 심지어 3-4년 늦는 것도 별일 아니라고 언젠가는 자기의 길을 찾아갈 거라고 상담을 해주던 나였다. 하지만 막상 그것이 내 상황이 되니 덜컥 겁이 났다.
어차피 여행을 가기로 결정을 했다면 오히려 아이들에게 긍정적인 쪽을 더 부각하기로 했다. 산호제에만 태어나고 자란 우리 아이들은 아직 우물 안 개구리였다. 주변부모들이 대부분 고학력자에 부유한 친구들만 보고 자란 아이들이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모습의 삶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때문에 부모처럼 혹은 주변의 어른들처럼 좋은 대학 좋은 직업을 가지지 않으면 큰일 나는 줄 알고 불안해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세상사람들이 아무리 ‘00이 성공한 인생이다. 000 하지 않으면 큰일 난다. 30대 전에 00 해야 한다 ‘ 외쳐도 우리 아이들은 당당하게 자신만의 길을 가길 바랐던 나였다. 그러니 어쩌면 여행은 자신만의 길을 찾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셈이다.
상담을 하고 아이들을 키우면서 늘 내 마음속에 바란 자녀를 향한 꿈은 좋은 대학을 가는 것도 성공한 인생도 아니었다. 실리콘 밸리에 살고 상담을 하면서 잘 나가는 사람들도 무척 많이 만났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도 이것이 없으니 한순간에 무너지고 좌절했다. 그것은 바로 회복탄력성, 바로 유연함이었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어떤 상황에서도 유연하게 사고하고 본인에게 닥친 문제들을 적절히 감당하며 살아가는 당찬 어른이 되길 바랐다. 이런 유연함의 발달은 크고 작은 문제 앞에서 스스로 문제를 극복하거나 어려움을 잘 받아들이고 다스리는 능력에 달려있다. 즉 상황을 다양한 각도로 볼 줄 알고 때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도전하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의 실패나 좌절등 받아들일 줄도 아는 능력이다.
이 마음의 회복력이 궁극적으로 긴 인생을 살아갈 때 자신을 지키는 힘이었다. 왜냐하면 인생은 절대로 우리를 평탄한 꽃길로만 인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아이들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하고 또 모든 어려움을 미리미리 치워주는 부모를 보면 안타까웠다. 건강한 육아엔 반드시 조건 없는 사랑과 아픈 좌절을 동시에 경험해야 하는 아이러니가 있다. 때로는 넘치는 사랑보다 뼈아픈 좌절이 궁극적으로 아이들에게 내면의 힘을 키우는 계기가 된다. 따라서 사랑만 주고 싶은 부모들의 모든 헌신이 궁극적으로는 아이들을 나약하게 만드는 것을 나는 숫하게 보았다.
나는 여행이 아이들에게 쓰지만 좋은 보약이 될 것이라 믿었다. (초반에 생각보다 너무 쓰기만 했다.) 다양한 경험과 재미있는 곳을 가기도 하겠지만 하기 싫은 일도 하고 참고 기다려야 할 순간도 만나게 될 것이다. 예측하지 못한 사건 사고도 있을 것이다. 늘 각자 방에서 편안하게 자신만의 공간을 누리던 사춘기 두 아이가 한방을 쓰면서 생기는 불화도 있을 것이고 갱년기가 시작된 나와의 마찰도 불 보듯 뻔했다. 하지만 이런 모든 일을 지혜롭게 잘 헤쳐나간다면 아이들은 한층 더 둥글둥글하고 매력적인 아이들로 자랄 것이라 믿었다. 그래서 우린 아이들과 함께 이 무모한 여행을 시작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