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중요한 건 뭘까?
캠핑카 여행을 결정하고 나서 남편과 대화는 주로 여행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혹시나 그가 마음을 바꿀까 싶어서 여행의 위험성 내지는 최악의 상황을 장황하게 늘어놓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도 꽤나 확고했다. 남편은 20년 넘게 똑같은 일을 반복하며 살았다. 거기에서 잠시 쉬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남편의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고 싶다는 바람도 있었다. 그것 중 하나는 삶을 단순하게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우리 집엔 유난히 물건이 많았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집안에 물건은 쌓여만 갔고 공간은 점점 좁아졌다. 물건을 담아두기 위한 물건을 사고 그 물건을 정리하기 위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썼다. 그러기엔 우리 인생이 너무 짧다는 것을 남편도 나도 깨달았다. 버리고 싶으나 엄두가 나지 않았던 남편은 이사나 여행 같은 큰 변화가 생기면 가능할 것이라고 믿었다. 자신도 미니멀리스트처럼 단순한 삶을 살고 싶다고 했다. 궁극적으로 짐정리를 하면서 남편은 미니멀리스트가 될 수 없다는 사실만 확인했지만 어쨌든 시작은 그랬다.
그렇게 시작된 캠핑카 짐정리는 냉장고에 코끼리 넣기보다 어려운 것이었다. 50평 넘는 집에 쌓여있던 물건을 12미터 남짓의 트레일러로 옮기는 셈이니 말이다. 물론 버리기도 했고 창고에 보내기도 하면서 물건을 정리했다. 캠핑카안에는 꼭 필요한 물건만 가지고 가야 했다. 그러다 보니 늘 '이 물건이 여행 중 꼭 필요할까? 얼마나 자주 쓸까? 한 개만 있어도 될까? 아니면 여유분이 있어야 할까?"라는 수많은 질문 속에서 선택해야 했다.
캠핑카여행이 남편 같은 맥시멀리스트에게 단순한 삶을 실천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긴 했다. 그가 아무리 이고지고 가져가고 싶어도 수납할 공간이 제한적이어서 어쩔 수 없이 포기하게 만들었다. 때로는 인간의 의지보다 환경의 제약이 훨씬 효과적일 때가 많다는 것을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캠핑카에 넣었다 다시 빼기를 수차례 반복하며 얼추 준비가 끝났고 우리는 가까운 곳으로 연습삼아 여행을 떠나보기도 했다.
우리보다 훨씬 단출한 여행자들도 훨씬 많다. 배낭하나에 모든 것을 넣고 다니는 여행자도 있으니까. 하지만 우리에겐 이 정도도 큰 도전이었다. 한 번도 줄여본 적 없는 살림살이를 십 분의 일로 줄이는 셈이었다. 그릇도 꼭 필요할 것 같은 것만 챙겼고 냄비랑 프라이팬도 큰 거 하나 작은 거 하나 칼도 부엌칼하나 과일칼 하나 등등 식구수에 딱 맞게 챙겼다. 옷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처음 캠핑카를 끌고 여행을 떠났을 때 '혹시 00에 없어서 불편하면 어떡하지? 갑자기 00이 필요해지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도 있었다. 하지만 막상 여행을 떠나고 보니 살면서 꼭 필요한 것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정말 따뜻한 잠자리, 물과 전기, 입을 옷과 먹을 음식만 있으면 그걸로 충분했다. 첫 여행을 떠났을 때 심지어 필요한 물건이 없기도 했다. 주걱이며 국자나 행주 등을 다 빼먹은 것이다. 하지만 그런 물건들이 없다고 우리가 밥을 못 먹거나 하진 않았다. 주걱대신 숟가락을 쓰면 되고 국자대신 밥그릇을 사용하면 그만이었다.
본격적으로 여행을 시작하면서는 오히려 캠핑카 안에서 조차 자주 쓰는 물건은 별로 없었다. 직장을 다니거나 사람을 만날 일이 없으니 혹시 몰라 가지고 온 외출복도 거의 입은 적이 없다. 당연히 구두나 핸드백 같은 것도 마찬가지였다. 캠핑장안에 있을 때나 밖으로 구경을 갈 때도 우린 편한 반바지에 티셔츠 그리고 백팩과 슬리퍼가 전부였다. 도마하나, 칼하나, 냄비하나 프라이팬 하나로도 충분히 요리는 가능했다. 예전엔 없으면 큰 일 날 것 같았던 식기 세척기, 로봇청소기, 세탁기, 정수기 등이 없다고 세상은 무너지지 않았다. 어쩌면 우린 필요보다는 편리에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건조차 그리 중요하지 않음도 알았다. 캠핑카를 끌고 다니다 보니 아직 운전이 미숙해서 캠핑카도 트럭도 여기저기 찍히기도 많이 했다. 특별히 캠핑카의 높이를 가늠하지 못한 남편은 나무가 세워진 길을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가다 나뭇가지에 캠핑카 윗부분에 스크래치를 내기도 했다. 거기다 캠핑카 안에 물건을 제대로 고정시키지 못해서 덜컹거리는 도로에서 떨어져서 부서지는 것들도 부지기수였고 갑자기 쓰던 냉장고가 고장나 먹지도 않은 음식을 어쩔 수 없이 버리기도 했다.
음식이나 물건을 버리는 것도 물건에 흠이 나고 고장 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남편이었지만 그 큰 캠핑카를 운전하면서 생기는 이런 소소한 일들엔 무뎌져야 했다. 그런 것보다 훨씬 위험한 일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운전하면서 느꼈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이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하고 아무도 다치지 않고 큰 고장이 없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걸 배웠다. 덕분에 캠핑카여행을 하면서 입에 달고 살게 된 말이 있다.
"아무도 안 다쳤으니 됐어."
"쓰는데 문제없으니 괜찮아."
"이 정도인 게 그나마 다행이야. 적어도 남의 차는 안 박았잖아."
"원래 없어도 되는 거였어."
예전에 호텔이나 리조트로 여행을 다닐 땐 평소보다 훨씬 깨끗하고 안락한 객실을 잡았다. 외출하고 돌아오면 청소도 되어 있고 식사 준비도 할 필요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관광이나 휴양에 가까웠다. 지금의 여행은 유목민생활에 가깝다.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일상도 살아야 하고 여행도 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과거의 그 어느 여행보다 훨씬 힘들다.
하지만 그 덕분에 넓은 집에서 평안한 생활을 할 땐 느끼지 못했던 가족의 소중함과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몸소 체험하고 있는 중이다. 물건보다 사람이 중요하고 사건사고만 없어도 감사해야 할 하루인 것을 깨닫고 있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고생을 해야 감사함을 느끼는 어리석은 존재임을 다시 새삼 느낀다. 그래서 뭐가 제일 중요하냐고? 진짜 중요한 것은 멀리 있지 않았다. 이미 우리 곁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