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지만 멈추지 않아
작년 10월 말에 트럭을 사고 11월쯤 캠핑카를 사버렸다. 남편과 내가 이제 공식적으로 여행을 가기로 확정하고 시행한 순간이다. 이렇게 트럭과 캠핑카만 사고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었으면 참 좋았겠지만 그때부터 진짜 고생이 시작되었다. 바로 집정리와 청소.
우리 여행에서의 가장 큰 장애물은 미지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23년 동안 살던 보금자리를 정리하는 것이었다. 남편의 여행을 그동안 무시했던 이유도 집정리가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남편은 맥시멀리스트이다.그는 물건을 사고 쟁여놓는 것도 좋아하지만 못 버리기로도 유명했다. 주변의 지인들이 우리가 여행을 떠나지 못할 것이라고 장담했던 이유도 집을 정리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짐이 많아진 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는 첫 아이 임신하고 들어간 이 집에서 23년을 살았다. 그 사이 이사라도 다니고 했으면 아마 중간에 버릴 기회가 있었을 텐데 우린 한 곳에만 있다 보니 살림살이가 차곡차곡 쌓이기만 했다. 거기다 23년을 사는 중간에 시부모님과 7년을 함께 살았다. 그렇게 두 집 살림이 합쳐지면서 짐은 더 많아졌고 5년 전 다시 분가하실 때 두분은 딱 필요한 물건만 가지고 가셨다. 시부모님의 방치된 짐까지 우리다 모두 가지고 있었다. 참고로 맥시멀리스트는 맥시멀리스트 가정에서 자란다. 그분들의 짐이 집마당 한구석을 오래도록 점령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남편은 태생이 손재주가 좋았고 나는 미술을 전공했으니 또 손재주가 좋다. 십여 년 동안 공부하며 모은 나의 미술재료도 많은 데다가 우린 고장 난 물건도 잘 고치고 쓸모없는 물건도 다시 디자인하거나 재활용을 잘했다. 남들은 벌써 쓰레기라고 버렸을 물건들을 ‘다음에 이렇게 고쳐서 쓰면 쓸 일이 있을 거야 ‘ 라며 모아둔 물건들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집안에서 많은 공간을 물건에게 내어주고 살았던 셈이다.
이민을 가거나 다른 주로 이사를 가는 것이라고 하면 오히려 업체를 고용해서 버릴건 버리고 대부분의 물건을 포장하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버려야 할 물건, 캠핑카에 들어가야 할 물건, 그리고 장기 렌트를 하는 창고에 들어갈 물건, 이렇게 세분류를 해야 했다. 오로지 남편과 나, 둘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2월부터 본격적으로 짐 싸기는 시작되었다. 집을 팔고 완전히 떠나는 여행이라 4월 중순까지 웬만한 짐을 정리해서 집을 부동산에 내놓아야했다. 남편은 실평수가 50평이 넘는 방 4개에 화장실 3개, 부엌, 차고하나 그리고 앞마당과 뒷마당까지 구석구석 가득 쌓여있는 물건들을 보며 늘 한숨이었다. "아.. 진짜, 언제 정리해? 이게 가능한 거야? 4월까지? 말도 안 돼" 왜냐하면 남편은 5월까지 매일 출근을 해야 했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퇴근 후와 주말밖에 없었다.
그때마다 나는 남편에게 "걱정하지 마, 내가 매일매일 조금씩 할게. 나를 믿어. 나는 하루의 힘을 믿어."라고 그를 안심시켰다.
그럴 때마다 그는 "너 혼자 이걸 언제 다해? 이게 지금 얼마나 많은데"라며 걱정했다.
"누가 한꺼번에 다한데? 아직 두 달이나 남았잖아. 매일매일 조금씩 한다고. 두고 봐 당신 두 달 뒤에 깜짝 놀랄걸?"이라고 장담했다.
남편과 나는 일하는 스타일이 다르다. 남편은 일이 있으면 한꺼번에 몰아서 끝내야 직성이 풀린다. 그러니 이런 큰 일 앞에서는 막막해하고 겁이 먹는다. 한 번에 몰아서 하기엔 너무 일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큰일을 작게 잘라서 꾸준히 하는 편이다. 그래서 오히려 큰 일 앞에서 담담하다. 시간만 충분하다면 가능하다고 본다. 나는 하루의 내가 해야 할 할당량이나 작은 목표를 차근차근 이루어 나가는데 능한 편이다.
나도 처음부터 이런 사람은 아니었다. 큰 일 앞에서 지레 겁먹고 도망가고 못한다고 손사래를 치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대학원을 다니고 그림을 그리고 논문을 쓰고 책을 출간하면서 배운 것이 있다. 바로 매일매일 꾸준히 하는 것이 가장 큰 효과를 낸다는 것이다. 100호짜리 페인팅을 완성하는 것도 스케치부터였다. 너무 막막했던 논문도 관심 있는 주제의 자료를 찾아보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책집필도 마찬가지였다. 첫 시작은 그냥 앉아서 첫 페이지를 채우는 것이었다. 나는 도무지 내가 할 수 없을 것 같은 일들을 매일 꾸준히 함으로 완성되는 경험이 많았다. 물론 처음에 시작할 땐 '큰일 났다. 언제 다해. 망했다.'를 되뇌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매달리면 언제가 끝을 볼 수 있었다. 때문에 나는 무엇보다 꾸준함의 힘을 믿는다. 그래서 남편에게 단언할 수 있었다. " 걱정하지 마, 나는 하루의 힘을 믿어."
그날부터 월요일은 안방책장, 화요일은 거실 책장, 수요일은 안방 옷장 목요일은 장식장등 이렇게 나만의 구역을 만들어 놓고 그렇게 매일매일 조금씩 짐을 정리했다. 버릴 건 버리고 캠핑카로 옮길 것 미리 옮겨두고 창고로 보낼 물건들은 박스에 잘 넣었다. 물론 처음엔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짐을 싸고 있기는 한 거냐? 하루 종일 뭐 한 거냐?" 남편이 핀잔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일주일 이주일 한 달 이렇게 시간이 흐르고 집은 점점 가벼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마르지 않는 오아시스처럼 짐은 계속계속 나왔다. 정말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냐 하는 마음으로 물을 퍼내었다. 덤프트럭 두대 정도의 쓰레기를 가득 채워 버리고 덤프트럭 한 대 정도 짐을 싸서 장기보관 창고로 보냈다. 그리고 나머지 꼭 필요한 짐들만 캠핑카로 옮겼다. 2달을 정리하고도 집을 비워주기로 약속한 전날밤 12시까지 짐을 싸야 했지만 어쨌든 남의 도움 없이 온전히 남편과 둘이서 모두 정리했다. 남편은 " 와! 이게 말이 돼. 우리가 이 짐을 다 치웠어." 그때 말했다. "내가 말했지? 나는 하루의 힘을 믿는다고. 앞으로 나만 믿고 따라와."
그 이후에도 여행을 하는 동안 우리는 큰일 앞에서 작게 잘라보는 연습을 하고 있다. 여행경로를 짤 때도 예산을 준비할 때도 잔고장이나 문제가 생겨도 '오늘 내가 할일'에만 집중하고 있다. 한꺼번에 보면 막막하고 두렵지만 작게 자르는 연습을 하고 있다. 예상을 빗나가도 당황하지 않고 서두르지 않고 오늘 하루에 집중하면서.